경남지역의 산

진주 수곡면 손경례가옥, 이충무공진배미유지, 영모재, 아침노을정원, 죽포재, 사곡마을, 묘엄사지 삼층석탑, 효자리조선조팔각형고분군, 영사재, 심호섭선생 독립만세 고창 유지비, 진주농민항쟁 기념비

정헌의 티스토리 2026. 7. 19. 19:19

■진주 손경례가옥, 이충무공진뱀이유지, 영모재, 아침노을정원, 죽포재, 덕곡서당, 사곡마을, 묘엄사지 삼층석탑, 진양효자리조선조팔각형고분군, 영사재, 심호섭선생 독립만세 고창 유지비, 진주농민항쟁 기념비, 진강사

 

진주 수곡면 일원 몇 군데 찾아봅니다.

특별히 화려하거나 크게 볼 것이 있는 곳은 아니지만 이웃 마을 탐방하듯 나름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여 봅니다.

손경례가옥과 이충무공 진배미 유지는 이충무공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용시 유지로 임진왜란이라는 역사적 의미가 있고, 영모재, 죽포재, 경모재, 영사재, 진강사 등은 일반 재실입니다. 사곡마을은 360년 진양하씨 세거지로 여러 고택 과 파리장서에 참여한 분들의 행적을 보실 수 있습니다. 묘엄사지 삼층석탑과 조선조 팔각형 구분군과 진주농민항쟁기념비까지 다양한 역사가 이웃에 있습니다.

 

▷일정

수곡면 손경례가옥- 이충무공 진배미 유지 - 영모재 - 오계절 식당 중식 - 아침노을정원, 죽포재,경모재 - 덕곡서당. 파리장서비 - 사곡마을 - 묘엄사지 삼층석탑 - 진양효자리조선조팔각형고분군 - 영사재 - 심호섭선생 독립만세 고창 유지비 - 진주농민항쟁 기념비 - 진강사  /  2026. 7. 18.

 

▷탐방후에

 

◐손경례 가옥

 

진주시 수곡면 손경례가옥을 찾아가는 원계리 마을 한가운데 노거수 느티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가운데 큰 공간을 남길 정도로 연륜이 있는 나무여서 쉬이 볼 수 있는 나무는 아닙니다.

 

 

 

 

 

내비에 손경례가옥으로 검색하면 이곳에서 안내를 종료합니다.

2층 가정집 입구로 도로에 차량 1~2대 쯤은 주차하실 수 있습니다.

좌측 뒷편 마을길을 따라 스테인리스로 된 두번째 대문집이 손경례가옥입니다.

 

 

 

 

 

위 2층집 좌측 2번째 집입니다.

초행이라면 카카오 지도에 분명 정확히 표시되어 있지만 찾기 조금은 어렵습니다. 집 주위에는 아무런 이정표가 없습니다. 마침 위 2층집 주인아주머니의 안내로 쉬이 찾을 수 있었습니다.

 

 

 

 

 

덕천로 504번길 15 (원계리 318번지)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대문이 닫혀 있지만 잠겨있지는 않습니다. 주인이 살고 있는 집이 아니어서 문을 밀고 들어가시면 됩니다. 

 

 

 

 

 

명랑, 회오리바다.....

必死則生. 必生則死  (필사즉생 필생즉사) 표지목이 세워져 있어 아~ 이집이 맞구나 싶습니다.

 

 

 

 

 

사랑채인 셈입니다.

 

 

 

 

 

앞에 충무공 이순신장군 삼도수군통제사 재수임(再受任) 사적비가 있습니다.

 

1957년 7월, 당시 이순신은 합천 초계에 있는 도원수 권율의 지휘 아래 백의종군하다가 도원수의 지시로 운공 손경레의 집에 머물며 군사훈련을 도와주고 있었습니다.

정유재란이 일어난 해 7월 18일 원균이 지휘하던 수군은 거재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합니다.

파직된 뒤 백의종군 하던 이순신 장군이 1597년 8월 3일 이곳에서 다시 삼도수군통제사 교서와 함께 기복수직교서(起復授職敎書)를 받은 역사적 현장으로,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이순신 장군이 다시 수군 지휘권을 잡으며 조선 수군 재건의 발판을 마련한 반전의 무대이기도 합니다.

이후 즉시 수군 재건을 위해 전라우수영으로 출발, 이후 명량에서 배설이 패퇴한 12척의 배로 133척의 왜군을 격파한것이 명량대첩입니다.

 

 

 

 

 

사랑채 모습입니다.

맨 좌측 방에는 장서실로 표시되어 있고, 서당임을 알리는 현판과 주련이 걸려있습니다.

 

 

 

 

 

첫 글자를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원계서당이 아닌가 싶습니다. 

마을이름이 원계리(元溪里)여서  여기서 원계라는 이름을 따오지 않았나 개인적 추측입니다.

주련은 도연명의  시라고 합니다. 

 

 

歲月不待人 / 도연명

 

人生無根蔕(인생무근체) 인생은 뿌리와 꼭지가 없어서  (가시 체)

飄如陌上塵(표여맥상진) 표연히 언덕 이 티끌같도다  (회오리바람 표, 두렁 맥)

分散逐風轉(분산축풍전) 나뉘어 흩어져 바람 따라 굴러다니  (쫒을 축, 구를 전)

此已非常身(차이비상신) 이는 이미 변함없는 몸이 아니도다

落地爲兄弟(낙지위형제) 이 땅에 떨어지면 다 형제가 되니

何必骨肉親(하필골육친) 하필 골육만 친함이 있으리오

得歡當作樂(득환당작락) 기쁨을 얻으면 마땅히 함께 즐거움을 짓나니

斗酒聚比隣(두주취비린) 한말 술이 가까운 이웃을 모으(은)다네

盛年不重來(성년부중래) 젊은 시절 거듭오는 것 아니오

一日難再晨(일일난재신) 하루에 새벽이 두번 있기 어렵네

及時當勉勵(급시당면려) 때에 이르면 마땅히 힘써 노력해야 하니

歲月不待人(세월부대인)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네

 

 

 

 

 

사랑채의 아궁이

사실 비어있는 집이라 잡초가 무성하고 주변 관리상태가 온전하지는 않습니다.

 

 

 

 

 

안채입니다.

 

 

 

 

 

앞집에 사시는 아주머님 말로 당시 손경례님은 상당한 재력을 가진 부자집이였다고 합니다.

근대에 지붕은 슬레이트로 개조하고 창도 달았습니다만 세월이 지남에 따라 많이 낡아 보기에 썩 좋지는 않습니다.

 

 

 

 

 

우측에 이런 노거수 은행나무도 있는데 잡초 무성합니다.

 

 

 

 

 

◐이충무공 陣배미 遺蹟(진배미 유적)

 

원계 마을앞 논가운데 진배미 유적이 있습니다.

 

 

 

 

 

수곡면 원계리 717-1번지

 

진배미 유적은 충무공 이순신이 임진왜란 때 백의종군할 때 말을 타고 달리고 군사를 점검하던 곳이다. '陣배미'라는 말은 군사를 점검한 곳이라는 뜻이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따르면 이순신이 손경례 집에 머무르던 때인 1597년 8월 3일에 삼도 수군통제사 재임명 교서를 받음으로써 이곳은 이순신이 백의종군한 마지막 장소가 되었다고 합니다.

1975년 나라에서 중무공 이순신의 호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충무공군사훈련유적비'를 세웠다.

★난중일기 1597년 8월 3일 내용

맑음. 이른 아침에 선전관 양호(梁濩)가 뜻밖에 들어와서 교서(敎書)와 유서(諭書, 깨우칠 유)를 가져왔는데 분부의 내용은 경상도 통제사에 임명한다는 명령이었다. 숙배(肅拜)한 뒤에 받은 서장을 써서 봉해 올리고 곧 길을 떠났다.    <현지 안내문에서>

  

 

 

 

 

이충무공유적비건립....

 

 

 

 

 

이충무공 군사훈련유적비

 

이곳은 이순신 장군이 1597년 (선조 30, 정유년) 손경례의 집에 머물면서 군사를 점검하고 말을 달리던 곳이다. 이곳에서 머지 않은 곳에 자리한 정개산성은 정유재란 발발 후 전라도로 들어가려는  일본군을 저지하기 위해 대비하던 곳이다. 이순신  장군은 송경례의 집으로 오기 전 정개산성에 있던 조방장 김언공과 종사관 황여일을 만나고 군사와 군량, 말먹이 등을 지원받았다.

<난중일기> 정유년 7월 29일 기사에는 '냇가로 나가 군사를 점검하고 말을 달렸는데 원수가 보낸 군대는 모두 말도 없고 활에 화살도 없으니 소용없었다. 탄식할 일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사의 냇가가 바로 진배미이다. 이곳에서 이순신 장군은 도원수로부터 지원 받은 군사의 훈련상태와 휴대한 무기를 점검하였고 그 허술함에 한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은 제방을 쌓고 터를 갖추었지만 400여년 전 냇가의 풀밭이었을 황량한 이곳에서 조선 수군의 수습에 고심하면서 한편으로는 주변 군사들의 훈련에도 골몰하였던 이순신 장군을 떠올려 볼 수 있다.

<현지 안내비에서>

 

 

 

 

◐영모재

 

원계리 뒷편 산중이지만 제법 넓고 평탄한 지형속에  영모재 (경상남도 문화유산자료)가 있습니다.

 

영모재는 헌종 13년에 세운 밀양 손씨 오곡공파 문중의 재실이다 이곳에는 시조 손순, 광리군 손긍훈, 밀성군 손빈, 규정공 손약수, 감찰공 손억을 비롯하여 수곡마을에 처음 입촌한 오곡 손수령을  모시고 있다.

건물은 본당인 영모재, 사당인 효충사, 사견당, 관리사, 문간채가 있다. 영모재는 앞면 5칸, 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가운데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왼쪽에 방이 두 칸, 오른쪽에 한 칸이 있는데 왼쪽의 방은 안이 하나로 뜷려있다. 이것은 19세기 중엽에 지어진 건물로서 조금의 변형은 있지만 조선 후기 재실 건축을 살필 수 있는 자료서서 가치가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대종회기금조성비

무송선생의 산하임지보상금 이천삼백만원과 보사(譜事, 족보 보)잉여금 6천만원  종원들의 성금 등 총계 1억3천만원을 들여 2004년말 현재 조성하였다는 내용이 적혀있습니다.

 

 

 

 

 

수곡 원계리에는 손씨가 많이 살고 계시나 싶습니다.

제법 규모가 있고, 당시 상당히 잘 지은 재실입니다.

 

 

 

 

 

외삼문에는 망장문(望牆門 / 바랄 망, 담장 장) ?

'장'자가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외삼문은 잠겨있고, 샛문도 없어 내부로 들어갈 수는 없었습니다.

 

 

 

 

 

영모정?

재실이지만 개략적으로 보면 일반 서원의 배치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인근 멀지않은 곳에 하경복묘가 있습니다만 길의 상태가 차량으로 진입하기에는 좋지않을 것 같고(사실은 모름) , 시간상으로 맞지않아 가 보지는 않았습니다.

 

하경복묘는 고려말 조선초의 무신 양정공(襄靖公) 하경복(1377∼1438) 장군의 묘입니다.
태종 2년(1402) 무과에 급제한 후 많은 관직을 역임하였는데, 특히 15년간이나 북방의 국경지대에 머물면서 오랑캐를 평정하여 변경 지방의 경비에 힘썼습니다. 성품이 너그럽고 활을 잘 쏘았으며, 군사정비를 위하여 많은 공을 세워 국가의 기틀을 견고하게 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고 합니다.
봉분 주위는 반달 모양으로 두둑하게 흙을 둘러 쌓았고, 봉분 아랫부분에는 긴 둘레석을 둘렀습니다. 조선 초기 묘의 특징을 잘 간직한 사각형의 묘지입니다.

 

 

 

◐오계절 식당 

 

수곡면 소재지에 오계절 식당이 있습니다.

옆에 수곡한식뷔페 식당도 보입니다. 수곡숯불갈비식당의 상호에서 한식뷔페로 바꾸었습니다.

 

 

 

 

 

간판의 주메뉴와는 달리 염소탕, 염소수육을 많이 찾으며, 수육을  드실려면 사전 예약을 하셔야 합니다.

전화는 010 - 3800-5767, 010 -9266- 8053

 

 

 

 

 

시골지역 면소재지에 소재하고 있으며, 번듯한 건물은 아닙니다.

 

 

 

 

 

수육을 장만하고 계십니다.

염소 특유의 냄새가 전혀 나지않은, 그래서 더욱 맛이 있습니다.

 

 

 

 

 

 

 

 

 

 

 

지역 맛집으로 통하는지 많은 손님들이 찾습니다.

 

 

 

 

 

◐아침노을 정원

 

수곡면 소재지 북쪽 근거리에 아침노을 정원이 있습니다.

수곡초등학교 뒷편으로 조금은 좁은 길을 따라 들어가면 차량 5~6대 주차 공간이 있습니다.

 

 

 

 

 

이곳 안쪽에 아침노을 정원이 있습니다.

 

 

 

 

 

아침노을 정원, 

민간정원 경남 제 33호로 지정된 곳입니다.

입구 빨간 우체통 앞에 입장료 7,000원 안내표지판이 있습니다.  대신 안쪽 카페에서 차를 무료로 제공하므로, 살짝 비싼 그러나 주변 꽃밭속의 카페에서 차한잔 하신다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먼저 좌측편 잔디광장과 카페 주변을 둘러봅니다.

 

 

 

 

 

이곳은 카페 주방인듯 싶습니다.

오늘은 주인이 출타중이십니다.

 

 

 

 

 

 

 

 

 

 

 

 

카페로 이용되는 건물로 반지하인 셈입니다.

좌측 빨간 문 안쪽은 화장실입니다.

 

 

 

 

 

넓지않은 면적에 

 

 

 

 

 

나름 손길이 많이 갔습니다.

 

 

 

 

 

윗쪽의 정원을 둘러봅니다.

 

 

 

 

 

넓은 면적은 아니므로 어떻게 둘러볼지 고민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미니 연못도 있습니다.

 

 

 

 

 

이곳은 아침노을정원 산책로,

1.6 km, 소요시간 30분으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뒤로 보이는 산능선을 따를 것 같은 느낌입니다. 

 

 

 

 

 

휘여저 윗쪽으로 오르면 

 

 

 

 

 

주인이 거주하는 주택인 듯 싶습니다.

 

 

 

 

 

주변,

 

 

 

 

 

다양한 품종의 수목과 화초를 보실 수 있습니다.

 

 

 

 

 

잠시 둘러본 아침노을 정원이었습니다.

 

 

 

 

 

 

◐죽포재, 경모?재

 

아침노을정원이 있는 마을 중간에 사당 죽포정이 있어 찾아봅니다.

두곳의 재실이 나란히 있습니다.

교천문(敎泉門)

창녕성씨 川齋共派 죽포공종회

 

 

 

 

 

죽포재(竹圃齋)

 

 

 

 

 

이웃하여,

솟을 삼문에는 무첨문(无忝門, 없을 무, 더럽힐 첨) 편액이 걸려있습니다.

 

 

 

 

 

경모재(敬慕齋)?

안내문이 없어 어느분의 재실인지는 잘 모르겠고, 대문이 잠겨있어 내부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덕곡서당, 파리장서비

 

수곡면 사곡리,

사곡마을로 가는 길목 덕곡마을 뒷편에 덕곡서당이 있습니다.

 

 

 

 

 

숭의문 편액을 달았으며, 정문이 잠겨있습니다.

 

 

 

 

 

좌측 재실 관리사쪽으로 돌아가면 협문이 있습니다.

 

 

 

 

 

덕곡서당

 

 

 

 

 

편액은 이렇습니다.

 

 

 

 

 

우측으로 묘소로 이어지는 협문이 있습니다.

 

 

 

 

 

處士晦峯河先生墓道碑(처사 회봉 하선생 묘도비)

회봉 하겸진 선생은 시곡마을에 사시면서 파리장서에 서명을 하신분 중 한분입니다.

 

 

 

 

 

파리장서비는 덕곡서원 바로 앞에 있습니다.

 

 

 

 

 

독립청원, 파리장서비

 

독립청원서에 서명한 전국 유림 137인 중 진주인은 4명이었습니다.

회봉 하겸진 집에서 회동한 하봉수, 이수안 등이 김창숙의 집회로 결의 서명하고 활동에 나섰다고 합니다.

이 비에는 3명의 인물만 기록하고 있으며, 여인헌 하재화님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사곡마을 입구 비에는 포함)

 

 

 

 

 

이곳에서 회봉선생 묘소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현 수풀이 무성하여 출입은 어려워보입니다.

 

 

 

◐사곡마을 / 파리장서 서명 기념비, 사양재, 누운소나무, 모덕재, 수졸재, 애각재 등

 

마을 앞에 독립청원, 파리장서서명기념비가 있습니다.

 

한국 유림대표 곽종석 등 137인이 참여한 청원에 진주 출신은 4인으로 모두 이곳 사목마을 회봉 하겸진 선생댁에 모여 결의. 서명하고 독립운동에 뛰어 든 것이다.

파리장서 서명 진추출신 4위(서명순)

 

회봉 하겸진(晦峯 河謙鎭)

晉陽人 1870~1946, 晉州 士谷

유학자 (朱語範要, 東儒學案 등 70여권 저술)

건국훈장 애족장(1995), 덕곡서당 향례.

 

백촌 하봉수 (栢村 河鳳壽)

진양인  1857~1839. 진주 사곡

유학자 (문집 10책 저술, 국채보상운동 참여)

독립운동 건국포장(1995)

 

매당 이수안(梅堂 李壽安)

재령인, 1859~1929, 진주 대곡

유학자 (經說 註解,경설 주해 등 10책 저술)

독립운동 건국포장(1995), 매호서당 향례

 

여인헌 하재화 (與人軒 河載華)

진양인, 1860~1937, 진주 사곡

유학자 (주자학 책판 제조, 덕천서원 복원 주도)

독립운동 단체 신간회 창립 발기인동

 

 

 

 

 

사곡(士谷)마을 안내도와 마을 유래

 

최초 거주 - 650년 역사

삼국시대부터 거주한 전설이 있으나, 문헌상으로는 하경복 장군의 출생지(1377)에 대한 기록이 있고, 삼공배미라는 터전이 남아 있다.

 

마을 창기 - 36년 진양하문 집성 세거지

석계 하세희 공께서 11대에 걸쳐 살던 정곡(효자리 우무실, 고려답 보존)에서 1663년 이곳 사곡으로 이주하면서 판윤공계 중심의 진양하문 반촌으로 성촌되었다. 그 후 분가, 제금 등으로 사곡리 일원의 대각, 덕곡, 대우, 구태까지 5개 마을이 집성촌을 이루었다. 따라서 진양 하문의 세거지 역사는 진주성 300년, 정곡 320년, 사곡 360년이다,

 

마을 지명 - 싹실 240년,  사곡 120년

고려의 군역부, 조선초기의 호패법과 호구제로 지명이 있었을 것이나, 공식 지명은 1642년 이하리(離下里, 울타리 밑 피난처라는 뜻)로 기록되고, 1894년에는 이하면이 되기도 했다.

이 때 이곡(狸谷, 삵실 / 삵 리) 지명도 같이 등장하는데, 마을 뒷산 중턱의 이암(삵바위)과 산토(産土) 앞의 이곡 표지석으로 볼 때, 전래 속명의 이곡이 삵실에서 싹실로 오랫동안 불려졌다.

사곡의 법정 명칭은 1906년 칙령, 1909년 민적법으로 확정되었다.

유래는 우곡 정온 선생께서 지리산에 은거하다 고향 사봉으로 낙향하는 길에, 당시 진주 성족간에 학문, 벼슬, 혼맥 등으로 교류가 깊은 연고지이자 옛 통행로인 이곳을 둘러보고, 사기만곡(士氣滿谷, 선비 기운이 가득한 고을)이라 읊은 데서 두 글자를 따온 것이다.

기록상(월아산기)은 월아산 정상에서 사방 100리를 살피면서, 지역성쇄와 姜. 河. 鄭 동관의 연과 근거지를 논하였는데,  싹실 쪽을 조망하면서 사기만곡 탁피소회지맥( 士氣滿谷 卓疲沼回之脈)을 기록하고 있다.

 

마을 변천

조선 중기 쟁의 심화로 싹실은 은일. 학문에만 치우친 시기이나, 천석꾼에서 만석꾼 부자가 3댁이나 있고(하동. 산청. 집현에 농장), 환성재, 각재, 송정, 지명당, 회봉으로 이어지는 남명학 연원가로서, 대유학자와 독립지사가 당시 삼성가(李), 효성가(趙)를 비롯 저문중과 인맥, 혼맥이 형성되었다.

6.25 때는 진주가 북한군에 점령되자 이곳이 지리산 자락에 위치하고 부자마을 소문으로 북한군(특히 공비)과 아군간의 격전지가 되어, 인명피해와 재물약탈, 한옥이 불타는 등 피해가 컸다. (지금도 총탄 흔적이 남아있고, 이병주의 실록소설 <지리산>에도 그려짐)

1948년 정부 수립 후 농지 개혁에 의한 지주해체와 경제사회 급변으로 지금은 50여 호에 못미치는 한촌으로 변했으나, 국회의원, 대학총장, 관료, 기업가 등 다방면에서 인물이 배출되고 있고, 다양한 문화유산과 유적이 많고 잘 보존되고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1.낙수암(송정 하수일 재실 / 도문화재 542호),  2.암각서화(장구지소),  3. 하경복 장군 묘(도기념물 제53호), 4.대각서원(도문화재 제344호), 5.이암(삵바위), 6.모덕재, 7.회봉선생 고택, 8 산토(産土),  9. 이곡(삵실) 표지석,  10.예암선생묘소, 11와송(누운소나모 보호수, 수령 360년) 12.묵와공 고택, 13 이산재 유지, 14 주자학책판(광명각 2,076매, 도문화제 제161호) 15.수졸재(도문화재 제567호), 16.춘곡정, 17.고재공 재실, 18 회양목(선비목, 수령 360년), 19.여인헌 고택, 20.함청헌 사적비,  21.관료선생 고택,  22.송정공 종택(송석세가),  23.송정문집. 책판(도문화재 327호),  24.재산분재기(도문화재 383호), 25.양정공 생가 표지석,  26.사영지(연못),  27.사양재(판윤공 재실),  28귀목(느티나무, 수령 360년), 29.사곡마을 창기비,  30.파리장서 진주인 서명기념비,  31.마을회관,  32.애각재,  33.사곡마을 표지석, 34.석계공 효향정려비,  35.덕곡서당,  36.파리장서 진주비.

 

 

 

 

 

마을앞에 제법 큰 방지가 있습니다.

가운데 석가산도 보입니다.

 

 

 

 

 

 

 

 

 

 

 

사양재 대문은 닫혀있습니다만 우측 진입로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사양재

 

 

 

 

 

 

사양재 현판,

 

 

 

 

 

이 집 한옥도 웅장해 보입니다만 대문은 닫혀있습니다.

육안으로 보기에 잘 지은 한옥이 눈에 띄지 않지만 사양재 뒷쪽 조금 상부에 송정공 종택이 있습니다.

송정공 종택(송석세가), 송정문집과 책판, 재산 부재기 등이 있는데 당일 몰라서 찾아가보지 못했습니다.

 

 

 

 

 

마을 앞 우물터,

 

 

 

 

 

예암(豫菴)선생 진양 하공지 묘비와,

처사 진양하씨 달중지 묘비 옆에 거대한 와송(누운 소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기묘하게 생긴 보호수 소나무 입니다.

 

 

 

 

 

 

이 집은?

역시 대문은 잠겨있습니다.

 

 

 

 

 

담 너머로 보면 이런 구조를 하고 있습니다.

회봉선생 고택이 아닌가 추정해 보지만 알 수 없습니다.

 

 

 

 

 

모덕재

누운 소나무 골목의 맨 상부, 막다른 곳에 위치한 건물입니다.

 

 

 

 

 

 

 

 

 

 

 

모덕재 현판입니다.

 

 

 

 

 

마을 앞으로 다시 나왔습니다.

 

양정공 하경복 (선생) 옛 집터.

양정공은 조선 태종, 세종때의 무장으로 1402년(조선 태종 2년) 무과에 급제한 후 여러 주요관직을 역임하였다. 특히 15년간이나 북방의 요지를 수비하면서 스스로 일선 경비를 담당하여 국방을 튼튼히 하였고, 계축진설의 편찬을 주관하여 군사교육의 교재로 삼았다.

이곳은 하경복 선생과 아들 한(漢) 손자 숙보 3대가 모두 시호를 받았던 충절의 고장으로 유서깊은 곳이다.

<비문의 내용입니다.>

 

 

 

대충 마을 가운데쯤 골목을 따라 봅니다.

이 집도 상당한 규모를 보이나 대문은 닫혀있습니다.

 

 

 

 

 

앞에 묵은 연지가 있는 이 집도 대단해 보입니다만 묵어있습니다.

마을 입구 안내도와 비교하면 여인헌 고택이 아닐까 싶습니다.

 

 

 

 

 

대문에 이런 편액이 걸려있습니다만 뭔 글자인지.....

 

 

 

 

 

마을 중심부이자 상부입니다.

 

 

 

 

 

이곳에 수졸재가 있습니다.

 

 

 

 

 

담 밖에 방지가 있고,

 

 

 

 

 

외 삼문은 거유문 편액을 달고 있습니다.

대문은 열쇠과 아닌 노끈으로 묶어 두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정면에 이산재(伊山齋) 유지(遺址) 표지석이 있습니다.

 

 

 

 

 

우측에 이런 옛 집이 있고

 

 

 

 

 

좌측엔 이런 집도 있습니다.

 

 

 

 

 

이산재터 뒷편으로 광명각, 좌측에 수졸재가 있습니다.

 

 

 

 

 

이산재 유지

수졸재 안내문을 보면 하계현을 추모하기 위해 후손인 하세진이 세운 재실의 부속 건물이 수졸재이고, 그 재실이 이산재인가 봅니다.

주춧돌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옆에서 보면 이런 모습입니다.

 

 

 

 

 

수졸재로 갑니다.

 

 

 

 

 

수졸재(守拙齋 / 졸할 졸) / 경상남도문화유산자료

 

수졸재는 하계현을 추모하기 위해 후손인 하세진이 세운 재실의 부속 건물이다. 재실은 붙타 없어지고 수졸재만 남있디. 1903년 처음 세울때에는 내효당(來孝堂)이라  이름하였으나 뒤에 하세진이 자신의 효를 따서 수졸재라 하였다.

다락처럼 높게 만든 누마루 형태의 건물로 가운데 온돌방을 두고 앞쪽과 양쪽에 마루를 둘러놓았다. 문을 열면 전체를 하나의 마루처럼 쓸 수가 있어 숙박과 모임의 장소로 활용되었다.

기단, 기둥 받침돌, 난간, 네 모서리의 활주를 받치고 있는 긴 받침돌 등은 크기는 작지만  섬세하게 다듬어서 건물과 잘 어울리며 건물 전체가 전통 한옥의 아름다움을 잘 나타내고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수졸재 현판 뒤로 松默世家(송묵세가. 잠잠할 묵) 편액이 걸려있습니다.

 

 

 

 

 

 

 

 

 

 

 

 

수졸재 옆에 이런 방지도 있습니다.

 

 

 

 

 

건물이 잘 지어졌다 싶습니다.

 

 

 

 

광명각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처음엔 광명각이 사당인가 싶었는데,  입구 안내문을 보고서야 장판각 역할(주자어류 목판 보관)을 하는 건물임을 알았습니다.

 

 

 

 

 

특별한 모양을 가진 괴석은 아닙니다만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돌을 이런 형태로 배치하였습니다.

 

 

 

 

 

광명각

 

주자어류 목판 (朱子語類 木板) / 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

이 목판은 <주자어류>를 간행하기 위해 나무에 새긴 총 3,069장의 책판이다.

주자어류는 송나라 여정덕이 주희와 제자들의 문답 내용을 모아 편집한 50책(冊) 분량의 책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선조 8년(1575)에 처음 간행되었고,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인조 때  만들었으나 다시 타버렸다. 영조 46년(1770)에 세 번째로 영남에서 만들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훼손되었다. 1904년에 곽종석을 중심으로 하재곤, 하세진, 이도술, 허균 등 영남의 선비 68명이 힘을 모아 산청에 있는 대원사에서 판각(하)여 보관하였다. 목판의 멸실 훼손 등으로 이곳에 광명각을 지어 옮겨 와 보관하고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수졸당의 뒷쪽 모습입니다.

지붕은 팔작지붕입니다.

 

 

 

 

 

수졸재를 둘러보고 되돌아 나갑니다.

 

 

 

 

 

다른 쪽으로 마을을 둘러봅니다.

 

 

 

 

 

이 집 또한 규모가 있으며, 주인이 살고있는것 같습니다.

 

 

 

 

 

마을 앞,

불루베리를 많이 재배하고 있습니다.

 

 

 

 

 

마을 회관앞으로 왔습니다.

카카오 맵으로 마을의 주요 건물을 검색해 보니 애각재가 빠졌습니다.

애각재를 찾아갑니다.

 

 

 

 

애각재에 왔습니다.

 

 

 

 

 

애각재 또한 문이 잠겨있어 내부로 들어가 볼 수는 없습니다.

대문 틈으로 본 애각재입니다.

 

사곡마을에서 가장 인상 깊은 곳은 보호수 누운소나무(모덕재 가는 마을안길 옆에 있음)과 수졸재 입니다.

사곡마을을 둘러보고 하경복 묘를 찾아가다가 마을 어귀에서 되돌아 왔으며(원계리 영모재에서 진입하는 길보다 좋음, 날씨가 무덥고 시간이 부족할 것 같아 중간에 포기했지만 찾아가 볼 걸 싶음), 대곡서원을 찾아갈려니(낙수암, 작은 교회쪽으로 돌아가는 길이 더 좋은 것 같음)내비가 사곡마을에서 마을 뒷길로 안내하는데 길이 좁고 수풀이 무성하여 차량진입이 어려워 보여 중간에 포기하였습니다. 

 

 

◐묘엄사지 삼층석탑

 

수곡면소재지에서 완사면 방향으로 조금 내려서다 묘엄사지 삼층석탑을 찾았습니다.

 

 

 

 

 

주변의 위치로 보아 넓은 면적의 절터는 아닌것 같아 보입니다.(안내문에는 상당한 규모였을 것으로 추정)

 

 

 

 

 

진주 묘엄사지 삼층석탑 / 보물

 

이 탑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2007년 이루어진 발굴 조사에서 묘엄사(妙嚴寺, 묘할 묘, 엄할 엄)라는 사찰의 이름이 새겨진 기와 조각이 발견되었다. 주변에서 불상과 승탑 등의 부재들이 여럿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당시 절의 규모가 상당히 컸을 것으로 보인다.

이 탑은 2층의 받침돌에 3층의 몸돌과 지붕돌을 올린 형태이다. 머리 장식은 일부분만 남아 있다. 각 층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졌으며, 몸돌에는 모서리 기둥이 새겨져 있다. 1층 몸돌의 한쪽 면에는 부처의 사리를 모신 공간이 있다는 의미로 문짝과 문고리 모양을 새겼다.

<현지 안내문에서>

1층 몸돌의 서쪽방향 벽면에 사각모양 안쪽에 문양이 새겨져 있습니다.

 

 

 

 

 

석등모양의 부자재들

 

 

 

 

 

부처의 사리를 모신 공간의 문짝과 문고리?

 

 

 

 

 

 

 

 

 

 

진양 효자리 조선조 팔각형 고분군

 

진양효자리 조선조 팔각형 고분군을 찾습니다.

들어오는 입구가 조금 좁고, 위치 파악이 조금 헷갈리지만 차량이 진입할 수 있으며 제법 규모의 주차장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들머리

 

 

 

 

 

완만한 편입니다.

 

 

 

 

 

입구에서 200m쯤

 

 

 

 

 

팔각 고분군에 도착합니다.

 

 

 

 

 

진주 수곡 팔각형 고분군 / 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

 

이 무덤은 수곡에 있는 팔각형의 무덤들 가운데 하나로, 태종 때 사온서(司醞署, 빚을 온, 관청 서 /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 술과 단술을 빚어 공급하던 기관) 직장(直長, 정7품의 관직)을 지낸 하현의 무덤이다.

무덤을 팔각형의 둘레돌을 두르고 봉분에 흙을 덮은 조선 초기의 무덤 형태이다. 둘레돌은 몸돌과 덮개돌로 되어 있는데, 덮개돌의 모서리 끝이 위쪽으로 향하고 있어 석탑의 지붕돌과 모양이 비슷하다.

무덤 앞쪽에 비석, 상석, 장명등, 석인상이 있는데, 장명등은 도난을 당하였다.

하현의 무덤은 낮고 평평한 언덕에 있다. 주변에서 토기 조각들이 발견되고 있어 오래 전부터 이곳에 사람이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서쪽 석인상

 

 

 

 

 

동쪽 석인상

 

 

 

 

 



 

 

 

 

 

 

 

 

 

◐영사재

 

수곡면 효자지 효동마을에 위치한 재실입니다.

영사재를 찾아 외지인이 볼 때 엉뚱한 곳인 효동마을회관을 지나 안쪽으로 오른면 조그만 효동마을이 있습니다.

 

 

 

 

 

처음엔 이곳이 영사재인가 싶었는데 아닙니다.

 

 

 

 

 

영사재는 마을로 들어오는 입구에 있습니다.

마을 진입로에서 살짝 안쪽으로 있어 도로에서 보이지는 않습니다.

 

 

 

 

 

대문은 이런 편액을 달고 있습니다.

 

 

 

 

 

영사재

문화재로 지정되거나 하지는 않았나 봅니다.

주변이 어수선하여 깨끗히 관리되고 있지는 않습니다.

 

 

 

 

 

영사재

마루로 오르는 디딤돌의 문양이 특이합니다.

 

 

 

 

영사재 편액

 

 

 

 

 

각도를 달리하여,

 

 

 

 

 

좌측 아랫쪽 건물은 관리사?

지금은 방치되어 있는 듯 싶고, 주변에 정비를 조금 하고 있는 중이나 조금 엉성합니다.

 

 

 

 

 

진양하씨 오공 (五公) 제단비

 

 

 

 

◐심호섭선생 독립만세고창 유지비

 

심호섭선생 독립만세 고창 유지비에 왔습니다.

 

 

 

 

 

심호섭선생 독립만세 고창 유지비 /국가보훈부지정 현충시설

 

이 유지비는 심호섭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2년 5월 15일 건립되었다.

심호섭 선생은 초대 수곡면장으로 재직시 서울에서 3.1독립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사재로 격문과 태극기를 만들면서 면내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리고 1919년 3월 22일 수곡면을 중심으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는 이 해 5월 20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 형을 언도받아 1여년의 옥고를 치렀다.

그 후 1926년경에는 일본의 동경, 명고옥(名古屋) 등지를 무대로 친일 한국인단체인 상애회와 근로조합을 상대로 투쟁하여 민족의식과 항일애국정신을 고취하는 등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현지 안내문에서>

 

 

 

 

 

도로변 노거수 느티나무 아래에 홀로 서 있습니다.

 

 

 

 

 

 

 

 

 

 

 

◐진주농민항쟁기념탑

 

진주농민항쟁기념탑에 왔습니다.

소공원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농민 의식의 성장 '진주농민항쟁' 농학 농민 운동의 도화선이 되다.

 

조선 말기 삼정(세금제도)의 문란은 농민의 빈부격차를 심화시켰다. 지주와 부농들은 토지를 독점했고, 농민들은 영세농이나 소작민으로 전락했다, 삼정 중에서도 환곡의 폐단이 심했다. 환곡의 운영과정에서 많은 곡식이 사라졌는데, 이의 주된 원인은 수령과 아전의 농간에 있었다. 이렇게 축이 난 환곡과 나머지 세금의 부족분을 충당하기 위해 농민의 토지에 새로운 세금을 부과하는 조치를 취했는데, 이를 '도결'이라 한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농민들은 부패한 수탈체제에 대항하여 항쟁을 일으켰다.

1861년 말 진주에서도 목사 홍병원이 도결 실시를 계획했고 이어 우병사 백낙신이 환곡의 부족분을 거두기 위한 다른 형태의 '통환'을 실시하려 하자 주민의 불만이 폭발하였다. 그동안 감영이나 비변사 등에 진정서를 내개도 했지만, 이것이 통하지 않는 것을 알고 류계춘 등은 집단 시위를 계획하였다. 수곡장에서 열린 주민모임에서 이런 계획이 관철되면서 드디어 2월 14일 덕산에서 농민봉기가 시작된다. 이후 관아 근처인 진주읍장터에 진주 전역에서 온 주민들이 모여 우병사와 목사에게서 도결과 통환의 실시를 취소한다는 문서를 받아내고 양 관리를 핍박하고 비리가 심한 아전을 징벌하기도 하였다. 이후에 농민들은 다른 마을로 행진하면서 농민들을 괴롭혔던 토호들도 공격하였다.

진주농민항쟁은 비슷한 처지에 있는 다른 고을의 농민들에게 커다란 자극을 주었다. 충청도와 전라도, 경상도 등에서 민란이 잇따랐고, 이는 점차 전국으로 퍼져 함경도와 제주도에서도 농민 봉기 조짐을 보였다.

이 시기에 잇달아 일어난 농민 봉기를  '임술 농민 봉기'라고 한다.,

조선의 조정도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여 삼정의 문란을 바로잡고 정치와 사회 개혁을 추진할 방안을 의논했으나 당시 지배충과 관리들이 이에 반대하면서 근본적인 해결책은 나오지 못했다. 한편, 농민들은 농민 봉기를 통해 의식이 크게 성장했다. 이러한 농민 의식은 1894년에 일어난 동학 농민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현지 안내문에서>

 

 

 

 

 

하늘 農夫 / 정동주

 

農事는

하늘 뜻 섬기는 일

農夫는

사람을 섬기는

하늘이외다.

하늘 보고

침 뱉지 말라

사람이 곧

하늘이니

人乃天. 人乃天

 

정동주님의 시  하늘 農夫를 쓰다. 임진 봄날 윤효석

 

 

 

진주농민항쟁 기념탑 안내문

 

 

 

 

 

 

 

 

 

 

◐진강사

 

 

수곡면 원내리 진강사를 찾았습니다.

 

 

 

 

 

일반 재실치고 상당히 잘 지은 집이라 일부러 찾아보았습니다.

 

 

 

 

 

이곳은 진주 유씨의 사당입니다.

 

 

 

 

서원이나 향교의 동서재 같은 배치를 한 건물이 좌우에 있습니다.

 

 

 

 

 

 

 

 

 

 

 

사당

대문이 잠겨있어 내부로 들어가 보지 못했습니다.

진주에 네시봉 저녁모임이 있어, 낮에 수곡면 일원을 둘러보고 모임참석에 갑니다.

인근 옥종면에서 몇 군데 찾아가 볼 곳이 있는데 다음기회로 미뤄야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