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주, 파주일원 둘러보기 / 양주 청련사,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권율장군 묘, 파주 마장호수 흔들다리,
윤관장군묘, 용암사와 용미리 마애이불입상, 헤이리예술촌, 프로방스.
마장호수 흔들다리를 보러간다,
서울 용산쪽에서 약 50km, 내비는 송추 IC쪽으로 안내한다, 양주 장흥면으로 들어서면 청련사, 양주시립 장욱진미술관,
권율장군 묘가 서로 이웃하고 있다,
마장호수로 가는 길은 꼬부꼬불 권율로를 따라 말머리고개를 넘어간다, 계곡을 따르는 길 주변 경관이 좋다, 펜션, 여러
음식점들이 계곡을 따라 줄지어 있다, 말머리 고개를 넘으면 가산저수지가 있다, 주변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고 이곳에서
점심을 먹었다, 인터넷 맛집 검색 또는 현지분위기로 음식점을 선택하곤 하는데 이 집은 가격에 비해 영 아니다 싶다.
늦은 중식 후 마장호수 출렁다리, 윤관장군 묘, 용암사를 둘러보고 파주 헤이리 예술마을을 들른다, 인근에 프로방스도
있는데 쌀랑한 날씨와 늦은 시간으로 인해 둘러보지 못하고 후일(3월 7일) 둘러본 내용이다,
양주 청련사 -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권율장군묘 - 가산저수지 주변 중식 - 파주 마장호수 - 윤관장군 - 용암사 와
용마라 마애이불 입상 - 헤이리예술마을 - 파주 프로방스 (2019. 2. 8. 프로방스는 3월 7일)
▷ 탐방후에
청련사와 양주시립미술관은 근거리에, 시립미술관과 권율장군묘는 서로 인접해 있다,
▣ 양주 청련사
양주군 장흥면에 위치한 청련사는 지금으로부터 1200여년 전 신라 흥덕왕 2년애 창건 되었으며,
당시에는 안정사라 불렸다 한다,
조선시대에 와서 무학대사께서 주석하면서 중창 후 여러차례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극락원 및 안정불교대학의 현대식 건물에 압도되어 호젓한 산사를 걷는다는 기대는 않는게 좋다,
우측 상단의 건물이 대웅전이며, 원통보전, 명부전, 삼성전 등의 부속 건물을 가진 천태종의 사찰이다,
대적광전,
대적광전은 청련사 극락원 및 안정불교대학과 같은 건물상에 있으며,
4층? 5층? 건물에 엘리베이트 까지 갖추고 있는 현대식 건물로 초행자라면 그 규모가 상당함에 놀랄 것이다,
범인의 시야로는 음지쪽 산 기슭에 자리하여 지리상 썩 좋다싶은 생각은 들지 않지만,
풍수지리에 통달한 무학대사는 대웅전 뒷편 석벽 아래서 7일 동인 인등을 밝히고 기도를 드려 관음보살의 화현신을
접하고 지금의 경북궁터를 선정하였다는 일화가 있는 엉험의 도량이기도 하단다,
무학대사는 무학봉 뒤에 큰물이 고이면 절이 크게 번창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는데, 실제 조선말기에 상수도 보급을 위한
대현산 배수지가 생긴이래 크게 번창을 하게되었다 한다,
▣ 양주시립 장욱진 미술관
청련사에서 이내,
도로변에 양주시립 장욱진 미술관이 있다,
도로 맞은 편에 주차장이 있으며, 미술관 입장료는 성인 5,000원 / 1인며, 청소년및 군인과 어린이는 1,000원,
영유아와 노인은 무료로 어른과의 금액 차이가 큰 편이다,
매표소 건물을 들어서면 이내 야외 조각공원이며,
장욱진 미술관은 하천 건너편에 있다,
앞쪽 다리를 건너기 전, 상부쪽으로 야외 조각공원을 먼저 둘러본다,
꿈,
흰 건물이 장욱진미술관이다,
미술관 상부쪽에 권율장군 묘소가 있다,
물론 묘지로의 정문은 별도로 앞쪽에 있지만 굳게 닫혀있고,
이곳 미술관과 자연스레 연결된다,
장욱진 미술관 외관이다,
하얀색 건물로 특이하지만 세련미를 보이는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입구,
'다층의 기록' 현수막이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우측으로 별도의 카페가 있고,
미술관으로 들어서면 매표소에서 끊은 티켓을 다시 한번 더 확인한다,
앞쪽 소품 매장이 있고, 1층은 다층의 기록전이. 2층은 장욱진의 작품이 진열되어 있다,
<다층의 기록> 전,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777 레지던스 입주작가전으로 산하 기관인 양주시립미술관 창작튜디오 777레지던스 2기 입주
작가 6인의 작품을 선보인다.
2017년1월부터 2018년 12월까지 약 2년 기간 동안 양주시 장흥에 위치한 777레지던스에 입주하여 활발한 창작 활동을
펼쳤다, 공공미술창작스튜디오 777레지던스 작업실은 작가 자신만의 조형언어를 구축해내는 가장 개인적이고 내밀한
창작공간이자 한편으로는 다양한 분야의 작가들과 함게 공통된 공간을 공유하고 교류. 소통하는 창구이기도 하단다,
<다층의 기록>전은 각 작가들이 양주시립미술관창작스튜디오 777레지던스에서의 입주경험을 바탕으로 창작한
회화, 복합매체, 영상, 사진 등 다향한 장르의 작품 50여점을 선보인다,
그들이 입주기간 동안 다양한 층위로 쌓아올린 각양각색의 창작활동은 작가적 성찰과 깊이있는 모색, 실험적 탐구의
예술 기록들이다, 이러한 입주작가 6인이 새긴 다층의 기록은 앞으로 그들이 나아갈 방향과 새로운 가능성, 또 다른
시작을 알리는 지표가 될 것이다,
노혜리는 학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조형예술과를 졸업하고 두산갤러리, 일본 아키요시다이 국제예술촌 등에서
다수의 전시를 가졌다. 작가는 오브제-몸-내레이션으로 구성된 세 요소들의 관례에서 나타나는 행위들을 퍼포
먼스로 표현한다,
<키드니><2017>는 두개의 무릎과 두 개의 신장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오브제와 신체는 서로 의지하면서
상호간 비슷한 움직임을 보이는데, 신체의 움직임에 따라 철재와 목재, 아크릴 등으로 이루어진 '무대'와
'신체'의 사이즈가 동일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박지혜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와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조형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갤러리 조선에서의
개인전을 비롯하여 다수의 개인전과 단체전에 참여하였다, 작가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사회 시스템의 기준과
조건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질문을 던진다,
작가가 제기하는 문제의식은 일상적으로 익숙하게 받아들여졌던 시회구조를위트있게 비틀어내어 타인과 공유하고
이를 새로운 시각으로 사유할 수 있도록 환기시킨다,
한동석은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조형예술과 전문사를 졸업, 서울시립대학교 철학과 석사과정을 수료하고
공간 국, 네덜란드 Showroom등에서 다수의 개인전과 단체전에 참여한 바 있다,
작가의 작업은 유튜브 You-tube채널에서 볼 수 있는 어느 한 개인이 제작한 영상에서 시작된다,
작가는 인터넷을 통해 받은 음성파일과 일상의 영상을 새롭게 재구성하고 편집하여 1인 미디어 시대에서 나타
나는 개인에 대한 초심의 단편, 혹은 개인이라는 단위가 재조직되어 유통될 새로운 국면등을 탐구한다,
2층으로 올라왔다,
사실 본인은 장욱진이 누구인지 모른다,
우연히 이곳을 지나다 보니 미술관이 있고, 들러보니 생각 외로 멋진 곳이다.
인터넷으로 장욱진을 검색하니,
1917년생, 1990년 사망,
충남 연기출생, 서울 양정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39년 일본 동경의 데이코쿠미술학교(帝國美術學校)에 입학, 유화를 전공하고
1944년 졸업하였다,
졸업 직후의 작품인 <마을>과 <독>은 한국인의 삶의 본색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정서를, 농촌의 여인상과 쌀독 같은 대상을
특이하게 단순화시켜 주제로 삼은 내용이다,
..................................
마치 아동하 같고 동화책의 그림 같기도 하면서 표현의 세련성과 조형적 구성의 치밀성으로 독특한 화풍을 보여주고 있다,
구체적인 주제 요소로는 시골 환경의 초가집, 기와집, 남녀노소, 강아지, 소. 새, 산, 나무, 해와 달 등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주제들을 자유롭게 또는 동심적이면서도 해학적으로 그려 장욱진 예술의 전형을성립시켰다,
...................
주요경력 서울대학교 교수, 중앙예술대상
<이상 다음백과에서>
장욱진은 어떤 화가예요?
화가 장욱진은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열중했다. 뛰어난 재능과 노력이 만나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일본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돌아와 잠시 국립중앙박물관 학예관으로 일했지만 오래지 않아 사직했다. 해방 후에는 김환기,
이중섭, 유영국 등과 더불어 '사실을 새롭게 보자'라는 기치 아래 신사실파를 결성했다.
장욱진은 덕소, 명륜동, 수안보, 용인 등으로 거처를 옮기며 작품 활동에 집중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불편한
곳에 머무는 걸 마다하지 않았다. 오히려 살던 곳이 개발의 명목으로 번잡해지면 주저하지 않고 다른 곳으로 집을
옮겼다. 그는 매일 새벽에 일어나 산책을 즐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장욱진은 단순한 선과 색으로 동심과 이상향을
표현했다. 주로 '집, 가족, 개, 소, 새, 해, 달, 산'이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장욱진이 생전에 남긴 "나는 심플하다"
라는 말 한마디는 그의 작품 세계와 삶 전체를 대변한다.
<양주 시립장욱진 미술관>
장욱진 화가의 여러 작품은 양주시립미술관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
오브제의 방
장운진은 그 스스호 되풀이해 외치던 "나는 심플하다"는 말과 같이 간결하고 단순한 삶을 추구했다,
그가 일생에 걸쳐 사용하고 남긴 유품 역시 군더더기 없이 소박하여 그의 '심플'한 삶의 단면을 보요주고 있다,
유춤은 그가 평생을 즐겼던 술을 위한 술병, 파이프 또는 필수적으로 필요했던 안경이나 시계와 같은 생활품이
주를 이룬다,
다만 창작활동에 있어서 필요한 도구들은( 유화물괌, 유화 붓, 서예 붓, 인장, 매직마터 등) 다양한 종류를 사용했다,
특정한 재료에 얽매이지 않았던 화가의 자유로움과 끊임없이 새로운 표현방식을 치열하게 고민했던 작가정신을 엿
볼 수 있다,
아카이브. 영상실
아커아브, 영상실에는 화가 장욱진의 예술철학과 생애를 면밀하게 살표볼 수 있는 다양한 유형의 장욱진관련 이카이브
자료와 영상을 감상할 수 있다,
아카이브 자료는 화가 장욱진의 예술생애와 관련된 자료를 약 10년 단위를 기준으로 8개의 휴형(생활기록물 및 문서,
사진, 기사, 전시부로슈어, 전시도록, 단행본, 정기간행물)을 각 주제벌료 나누어 분류했다,
이곳 영상실에서 장욱진 화가에 대한 영상을 한참동안 봤다,
미술관은 외형과 달리 내부 설계도 멋지게 되었다,
대체로 대충 둘러보았지만 이곳에서 보낸 시간은 생각외로 길었다,
모자상,
민복진 작,
같이 둘러보면 좋을 곳이다,
미술관 상부(바라보았을때 우측)에 권율도원수 묘소가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시이며 명장인 권율(1537~ 1599)과 정부인 창녕조씨, 후부인 죽산 박씨의 묘이다,
권율은 안동 권씨로 선조 15년(1582)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거쳐 의주목사로 근무하던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 광주목사에 임명되었다,
한양 수복을 위하여 북상하였으나 용인싸움에서 패하자 다시 광주로 되돌아가서 군사를 모아 충청도 금산 이치싸움에
서 왜적을 대파사켜 전라도 지역을 지켰다, 이어 함락된 한양의 수복을 위하여 다시 북상하던 중 수원 독산산성에서 진
지를 구축하고 왜군의 진격을 막았다, 아후 행주산성으로 진지를 옮겨 권율이 일사분한하게 통솔하고 군사들은 사력을
다해 싸워 대승을 거둔다, 권율은 이 공으로 전군을 지휘하는 도원수가 되었으며, 선조 29년(1596)에는 충청도관찰사
가 되었다, 선조 332년(1599) 관직을 물러나 그해 세상을 떠나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조선시대 사대부 집안의 일반적인 묘역구조는 봉분 앞에 묘비(墓碑), 혼유석(魂遊石), 상석(床石), 향로석(香爐石)이 있고
상석앞에는 장명등(長明燈)이 있고, 그 양쪽으로 망주석(望柱石), 문인석(文人石)을 각각 1쌍씩 세원다,
신도비는 종2품 이상의 공신이나 훌륭한 학자에게 허용되었던 것으로 묘의 남쪽 가가이 세웠다,
권율의 묘소에는 묘비, 상석, 향로석이 각 1기씩 있다.
그리고 무덤을 알리는 망주성과 무덤울 수호하게 위해 세우는 동자석, 문인석이 각 1쌍씩 세웠다,
묘역의 입구에 있는 신도비는 기존의 신도비가 비문이 닳아 없어져 철종 12(1861)에 권율의 후손들이 새로 건립한 건이다,
1971년과 1999년 정화사업으로 묘을 새롭게 단장했다,
<이상 권율장군 묘역은 문화재청 자료를 발췌핬다>
좌측 흰 건물이 보이는 곳이 미술관이다,
▣ 마장호수 출렁다리
양주시 장흥면에서 꼬불꼬불 말머리 고개를 넘으면 포천땅이다,
기산 저수지 주변에서 때늦은 점심을 먹었다, 어느 한식집을 찾았는데 가격대비 음식은 별로이다,
마장 저수지 까지 갔다가 점심먹을 곳이 없어 되돌아 간 곳이데 모처름 찾은 집이 만족스럽다면 그보다
더한 기쁨도 없을텐데 커피 맛까지 없다,
마장 저수지 주변에는 크지않은 주차장이 여러곳 있다,
주차료는 받는듯? 받지않는 듯?
오늘은 무료이다,
오늘은 날씨가 제법 춥다.
마장호수 흔들다리는 국내에서 가장 긴 보도교량으로 길이는 220m, 보도폭은 1.5m이다,
중간에 유리잔도의 형식을 빌어 작지만 애교가 있다,
수면에서의 높이는 높지않아 크게 공포를 느끼거나 하지는 않으나
흔들거림은 제법 많다,
저수지 둑 방향,
마장저수지변으로 산책로를 조성하여 한바퀴 돌 수 있도록 하였다,
한시간 까지는 채 걸리지 않을 듯 ?
상류쪽이다,
저곳에서 출발해도 되겠다,
저수지변 산책로를 따라 주차장으로 되돌아 간다,
저수지는 꽁꽁 얼어붙었지만,
버들강아지에겐 봄이 오고 있다,
면제교육장?
일반조종면허시험 면제교육기관,
뭘 면제해 주는 교육장인가?
지나온 곳을 되돌아 본다,
천천히 저수지를 한바퀴 돌고, 흔들다리도 건너고,
저수지 상부쪽으로는 음식점 또한 많아 한동안 시간보내기엔 더없이 좋을것 같다,
▣ 윤관장군 묘
파주군 광탄면에 위치한 윤관장군 묘에 왔다,
마장저수지에서 광탄면 소재지를 거쳐 용미리 마애2불입상을 보러가는 길목 도로변에 있어 둘러본다,
윤관은 고려 예종 때 여진 정벌의 공이 컸던 고려의 명장이자 문신이다,
고려 태조를 도와 후삼국통일을 이룩한 윤신달의 현손이며 윤집형의 아들이다,
고려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1104년 동북면행영병마도통사가 되어 고려의 변방을 침범하던 여진을 정벌하였다,
이때 특수부대인 별무반을 창설하였으며, 1,107년 대원수가 되어 부월을 하사받고 오연총을 부원수로 하여 17만 대군을
이끌고 여진을 정벌하였다,
이 정벌에서 고려군은 여진을 두만강 북쪽 7백리 까지 몰아내고 9성을 축조하였으며, 선춘령에 고려정계비를 세웠다,
윤관은 4차에 걸쳐 여진 정벌을 하였으며, 북방의 백성 75,466호를 점령지에 이주시켜 생활의 안정을 영위토록 하였다,
관직이 문하시중에 이르렀고, 문무를 겸전한 척지진국공신이다,
1111년 5월 72세로 사망하였으며 1130년 예종의 묘정배향공신이 되었다,
조선의 성종, 선조, 숙종, 영조는 윤관의 후손에게 7역을 면제하라는 교를 내렸다,
오늘 둘러본 권율장군의 묘지와 비교 할 때,
본인의 눈에는 이곳의 지형이 더 좋아 보인다,
묘지를 올려다 보았을 때 우측편,
좌측편,
묘는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 여충사 경내에 있다,
1988년 2월 사적 제323호로 지정되었고, 매년 음력 3월 10일과 10월 5일 여충사에서 제향을 올리고 있다한다,
▣ 용암사와 용미리 마애이불입상
용미리 마애2불 입상을 보기위해 용암사에 들런다,
용암사 역시 들머리 도로변 주차장에서 가까운 (100m쯤) 거리에 있다,
대웅전이든가?
종각과,
퇴설당(堆雪堂 / 주지스님이나 강사가 겨처하는 곳)을 가진 조그만 사찰이다,
이불입상(二佛立像)으로 간다,
마애이불입상은 용암사 좌측 조금 상부에 있다,
두 구의 불상이 나란히 서 있는 마애불로 천연암벽을 적절히 활용하면서 선각을 더해 불신(佛身)을 표현하였고,
불두(佛頭)는 따로 만들어 얹었다,
전면에 있는 향좌측의 마애불은 향우측 불상에 비해 키가 더 크고 둥근 갓을 썼다,
왼손을 어깨 높이로, 오른손은 가슴 높이로 들어 연꽃 줄기를 붙잡고 있다, 여래로서 연꽃 줄기를 들고 있는 경우는
석가모니 혹은 미륵불로 해석되는 경우가 많은데, 해당 불상의 명문에 미륵불을 언급하고 있어 미륵불로 추정된다,
불상은 넓은 어께를 당당하게 벌리고 있어 웅장한 느낌을 준다, 통견의 착의를 하고있다, 연꽃줄기 아래의 가슴
부분에는 속의 가사를 입을 때 묶는 리본 모양의 띠 매듭이 보인다, 그 아래로 왼쪽 어깨로 쏠려 올라가는 듯한
U자형 옷 주름이 반복적으로 표현되며 흘러내리고 있는데 바위 맨 아래까지 흐릿하게 이어지고 있다, 좌우로는
양팔에서 흘러내린 소매자락이 은행잎 모양의 옷 주름을 만들며 허리 아래에까지 늘어져 있다,
향우측 불상은 향좌측 마애불보다 키가 조금 작지만 얼굴이 더 크며 네모난 갓을 쓰고 합장하고 있는 모습이다,
바위의 자연적 상태 때문에 몸은 약간 옆으로 튼 모습이지만 얼굴은 둥근 갓을 쓴 마애불과 마찬가지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마치 두 불상이 어깨를 맞대고 있는 듯한 인상이 흥미롭다, 착의법의나 옷자락의 흐름은 옆의 마애불과 같지만 바위
면의 폭이 좁기 때문에 바위 측면에도 옷자락을 새겼다,
전하는 바로는 연꽃을 든 상은 남성, 합장한 상은 여성을 표현한 것이라고도 한다,
한편 이 마애불에는 고려 때의 조성 연기가 전하는데 다음과 같다, 고려 선종(재위1083~1094)이 자식이 없어 원신궁주
(元信宮主)를 맞이했는데 역시 후사가 없었다. 그러던 중 궁주의 꿈에 두 도승이 나타나 말하기를 우리는 장지산(長芝山)
남쪽 기슭에 있는 바위틈에 사는데 지금 매우 시장하다 하였다. 다음날 사람을 보내 알아보니 장지산 아래에 두개의 큰
바위가 나란히 서 있다고 하였다. 이상하게 여긴 왕은 이 바위에 꿈속의 두 도승을 새기게 하고 절을 지었는데, 마침 그
해에 왕자 한산후가 탄생하였다는 것이다,
기존에는 이 설화를 고려해 이들 마애불의 제작 시기를 고려 전기인 11세기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암벽 면에는 성화(成化)7년
의 명문이 발견됨에 따라 조선 초기의 작품일 가능성이 새롭게 제시되었다. 즉 성화7년은 1471년(성종2)에 해당하는데, 이전
에는 이 명문을 마애불을 제작할 때 새겨 넣은 것이 아니라 후대인 조선 초기에 기록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최근에 와
서 명문에 등장하는 추모 대상인 세조 및 그와 연관된 인물들의 능묘가 파주에 많이 분포하고 있어서 마애불을 새롭게 조성할
만한 의미가 충분하다는 점이 지적되었고, 아울러 연꽃을 든 마애불이 쓴 둥근 갓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관모로 사용된 것
이기에 이들 마애불은 조선 초기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이상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
▣ 헤이리 예술마을
헤이리 예술마을는 문화와 예술의 창적, 전시, 공연, 축제, 교육이 모두 한 곳에서 이루어지는 종합적인 예술문화
마을이다,
1997년 파주출판도시와 연계한 책마을을 구상하는 과정에서 다른 분야의 문화 예술인들이 참여하면서 문화예술마을로
개념이 확장되었다,
가수 윤도현, 소설가 박범신, 방송인 황인용, 영화감독 강제규, 강우석 등 문화 예술계의 저명한 인사들을 포함하여
다향한 예술분야에 걸쳐 총 370여 회월들이 있다,
헤이리라는 독측한 이름은 파주 지역에서 농사지을 대 부르던 전통 농요인 헤이리 소리에서 따온 것으로 순수한 우리말이다,
헤이리 마을에 가면 우선 8번과 9번 출입구 중간의 마을 주변 도로변에 위치한 커뮤니티하우스(사무실)에서 안내 정보를 얻은
후에 본격적으로 둘러보는 것이 좋다, 종합예술마을이라 규모가 너무 커서 걸어서 돌아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당일은 차량으로 이곳 저곳 둘러보았다,
면적이 넓고,
겨울철 늦은 오후시간이라 둘러보는 이 또한 적어 조금은 썰렁해 보였다,
여러 곳에 주차시설이 있으나 어디 무었이 있는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프로방스가 있는데,
시간도 늦고하여 이만큼에서 오늘 일정을 마친다.
저녁은 서울 이촌시장내 어느 일식집에서 식사를 했다, 인근에 사는 연예인들이 자주 들러는 집이라고 한다,
요즘 TV방송에서 그의 본 적은 없지만 탈렌트 윤정수도 얼굴에 주름이 많이 생긴것 같다,
▣ 파주 프로방스
파주 프로방스 마을로 왔다,
도로를 따라 주변 여러 음식점들이 있고, 프로방스 주차장도 있다.
주차료는 유료이여, 주차장 주변의 가게를 이용했을 경우 할인혜택이 있다.
마을의 중심가는 주차장 아랫쪽이나 윗쪽으로 이와 비슷한 건물들이 몇몇 있다.
주차장 아랫쪽으로 내려서면 이런 건물들의 가게들이 있다,
이건물 윗쪽은 주차장.
아랫쪽은 가게이다.
프로방스는 대체로 젊은 층들이 한나절 이곳저곳 쇼핑과 둘러보기 좋은 곳일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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