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지역의 산

보성 소설 태백산맥 문학기행길

정헌의 티스토리 2021. 7. 13. 21:52

■ 보성 소설 태백산맥 문학기행길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엔 정작 태백산맥은 나오지 않는다. 주 배경은 지리산이다. 제목인 태백산맥은 한민족을 상징한다고 보면 되겠다.

소설 태백산맥의 자취를 찾아 벌교를 찾아본다.

벌교의 소설 태백산맥 문학기행길은 태백산맥 문학관이나 홍교주변 또는 태백산맥 문학길 군데군데 주차장이 조성되어 있어 마음 내키는 곳에 주차하고 둘러보면 된다.

벌교읍 소재지가 그렇게 넓은 곳이 아니므로 어느 한 곳에서부터 출발하여 문학기행길을 따라 도보로 한바퀴 돌아도 되겠고, 아님 걸음을 조금 적게 걷고자 한다면  태백산맥 문학관권역과 중도방죽권역, 태백산맥 문학거리 권역으로 구분하여 차량으로 이동하여 가며 둘러봐도 되겠다.

 

 

 

▷ 가는 길

 

 

▷ 탐방코스

중도방죽 - 벌교역 - 술도가. 보성여관. 금융조합. 태백산맥문학공원 - 월곡 벽화마을 - 채동선 생가 - 홍교 - 자혜병원터 - 채동선 음악당 - 중식 - 태백산맥문학관. 소화의 집. 현부자네 집  (2021.  7.  10.)

 

 

 

▷ 탐방안내도 

 

 

 

 

▷ 탐방후에

 

 

먼저 중도방죽으로 왔다.

순천에서 벌교를 지나 보성으로 이어가는 4차선 국도의 벌교대교에서 내려선 지점이다.

벌교 다목적 체육공원 주차장에 주차해도 되지만 중도방죽을 알리는 이곳에서 출발함도 무난하다.

 

 

 

 

 

 

중도방죽은 일본인 중도(나카시마)의 이름을 따 붙여진 간척지의 이름이라 한다.

그가 살았던 집은 들판 첫머리에 지금도 남아있으며, 소설에서는 방죽을 쌓던 때의 그 어렵고 힘들었던 일을 하대치의 아버지 하판석 영감이 이야기하는 형식을 빌어 묘사하고 있다.

 

 

 

 

 

 

방죽길을 따라간다.

 

 

 

 

 

 

저만큼 건너편으로 이어지는 목교를 놓았다.

 

 

 

 

 

 

목교를 건넌다.

목교를 건너기 전 쟁동마을 바다쪽으로 둑방길로도 길이 이어져 시간이 되면 걸어봄직한 유혹도 느끼지만 오늘은 그럴 시간이 없다.

 

 

 

 

 

 

위 목교에서 바라본 벌교쪽.

 

 

 

 

 

 

역시 위 목교에서 바다쪽 경관이다.

멀리 보이는 다리는 순천에서 영암으로 이어가는 남해고속도로.

 

 

 

 

 

 

갈대밭 속으로 데크길을 만들었다.

 

 

 

 

 

 

같이한 일행들.

몇 분 빠졌다.

 

 

 

 

 

 

갈대밭 속으로 난 데크길을 따른다. 때마침 날씨가 흐려 걷기좋다.

바람도 약간씩 불어 준다.

 

 

 

 

 

 

 

 

 

 

 

 

 

벌교대교쪽으로 한바퀴 돌면 될 듯하나 앞서가던 회원들이 길이 없다며 되돌아 온다.

그래서 온 길을 따라 되돌아 가는 것으로 한다.

그늘이 없어서 여름철에는 걷기 힘들겠지만 걷기좋은 길임에 틀림없다.

뒤에 다시 찾는 다면 이곳 저곳 좀더 길을 걸어볼 생각이다.

 

 

 

 

 

 

태백산맥 문학거리로 이동하면서 차창으로 본 벌교역.

중도 방죽 인근의 구 철도로 볼 수 있다.

 

 

 

 

 

 

보성읍내 태백산맥 문학거리로 왔다.

(원조)꼬막식당 앞에서 부터 문학거리가 시작한다.

이 길을 따르면 술도가. 남도여관. 금융조합을 지나 벌교읍사무소(행정복지타운)으로 이어지며 조금더 진행하면 홍교이다.

 

 

 

 

 

 

도로변 건물을 일부 근대근물로 포장했다.

 

 

 

 

 

 

술도가집은 리모델링 중이다.

 

 

 

 

   

 

일제 강점기부터 벌교 일원에 막걸리를 공급해오던 도가집은 소설 태백산맥의 도입부부터 등장하는 정하섭의 본가이며 하섭과 소화 간의 애절한 인연의 배경이다.

소설에서 지식인 청년 정하섭과 지역유지인 아버지 정현동 사이의 갈등은 해방정국에 벌교에서 벌어졌던 이념갈등의 전형적인 예로 묘사되어 있다.

 

 

 

 

 

 

술도가를 지나면 이내 좌측편에 보성여관(남도여관)이 있다.

 

 

 

 

 

 

조정래 작가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속 '남도여관'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보성여관은 일제강점기 벌교의 가장 번화한 중심가에 위치하였으며 당시에는 5성급 호텔을 방불케 할 정도의 규모였다.

전형적인 일본식 2층 목조건물로 2004년 역사및 건축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등록문화재 제132호로 지정되었다.

소설에는 임만수와 그 대원들이 숙소로 이용하기도 했다.

 

 

 

 

 

 

관람료는 성인  1,000원이며,  음료를 포함할 경우 3,000원이 추가된다.

 

 

 

 

 

 

입구의 1층엔 소극장이 있어 찻집과 겸용된다.

소극장 대관료는 1시간당 50,000원, 최대 3시간 이용가능하며, 음악회가 열리기도 한다.

 

 

 

 

 

 

객실은 주로 2인실(최대 3인)이며 80,000원~100,000원(3인실/최대 5명은 150,000원) 선이다.

 

 

 

 

 

 

2층엔 다다미방이 4개 있다.

세미나 및 회의장소로 대관도 하며 1시간당 100,000원, 1일 최대 4시간 까지 대관가능하다.

 

 

 

 

 

 

보성여관 바로 옆은 벌교초등학교 정문이다.

가로등 기둥엔 예쁜 실로 짠 옷을 입혔다.

 

 

 

 

 

 

초등학교 정문 옆에 위치한 개구리 문구정.

어릴적 먹던 군것질 것리 추억의 과자 쫀드기, 맛기차, 라면짱, 꾀돌이, 아폴로, 별사탕, 돌사탕, 맥주사탕, 햄버거젤리, 오다리.............

구경하러 오세요.

 

 

 

 

 

 

현대의 건축물 외관을 근대적 느낌이 나도록 살짝 리모델링한 건물이 몇 보인다.

사진상의 건물인지는 모르겠으나 소설속의 동아책방은 정하섭을 사랑한 정님이 아버지가 운영하는 책방으로 나온다.

 

 

 

 

 

 

중간 문학거리 주차장.

 

 

 

 

 

 

 

 

 

 

 

 

 

 

금융조합

 

벌교금융조합은 붉은 벽돌을 바탕으로 하고 그 사이사이에 돌을 깍아 넣어 건물의 견고함과 장식적 효과를 동시에 노린, 일본인들의 관공서형 건물로 즐겨 지었던 그 모습이다. 지금도 변함없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지난 역사를 반추하게 해주고 있다.

그 위치 또한 번화가의 첫머리인 삼거리에 자리잡아 고객들의 편리를 최대로 도모한 세세함을 보여주고 있다.

 소설에는 금융조합장 송기묵이 일제강점기부터 금융조합에 근무해온 이력을 지닌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친일파가 척결되지 못한 이 땅의 비극이 수없이 많은 분야에서 그런 식으로 기득권을 행사했음을 작가는 여러 주인공들을 통해 일깨우고 있다.

「금융조합이라는 것이 결국은 돈 장사이고 보면 그의 이재(이재) 솜씨는 멋 부리는 것보다 한 수가 더 앞질러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태백산맥 1권 284쪽)」 송기목은 돈을 다루는 사람답게 지부에도 능해 은밀하게 고리대금업까지 해가며 탄탄한 채력을 확보해 딸을 서울의 이화여대에까지 유학시키지만 결국 좌익들에게 죽고 만다.

 

< 안내문에서>

 

 

 

 

1918년 '벌교금융조합'으로 사용되어 오다가 1926년 '농촌지도소 벌교지고', 벌교지역 '농민상담소' 등으로 활용되었다.

현재 내부는 벌교금융조합의 역사와 한국 화폐사에 대한 전시로 구성되어 있다.

 

 

 

 

 

 

금융조합 앞에 모리씨 빵가게가 있다.

젊은 층에는 인기있는 빵집이다.

 

 

 

 

 

 

역시 금융조합 앞쪽이다.

태백산맥 문학공원의 일부로 주차장이 조성되어 있다.

 

 

 

 

 

 

금융조합을 둘러보고 좀더 읍사무소 쪽으로 진행하면 태백산맥 문학공원이 있다.

 

 

 

 

 

 

소설가 조정래님의 얼굴음 음각으로 처리했다.

 

 

 

 

 

      

이곳 태백산맥문학공원 좌측편에 월곡영화마을 벽화거리가 있어 시간을 내어 잠시 둘러본다.

 

 

 

 

 

 

나를 잊지 말아요 다시 사월이 올 거예요

나를 잊지 말아요 다시 사월이 올 거예요

남쪽바다 멀리 따뜻한 바람이 불어올때

노래하며 올게요 니 철부지 종달새 되어

거리마다 가득 눈부신 초록이 번져갈 때

손 흔들며 올게요 나 싱그런 이파리 되어

 

.................................................

 

 

 

 

 

 

골목 적당히 둘러본다.

 

 

 

 

 

   

청년단이 있었던 곳.

안내표지판으로 대신한다.

 

 

 

 

 

 

부용산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

63구간 시점과 종점 표시가 있는데 63구간이 뭐지?

홍교방향(520m)으로 향한다.

 

 

 

 

 

 

3층의 잘지어진 건물(유치원?) 모퉁이에  채동선생가 이정표가 있어 둘러본다.

3층 건물 우측 뒷편에 선생의 생가가 있다.

 

 

 

 

 

 

음악가 채동선(1901~1953) 선생은 이곳 벌교에서 태어나 순천공립보통학교 졸업 후 지금의 경기고등학교인 제일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였다.

이때 홍난파의 바이올린 독주에 매료되어 1년동안 홍난파로 부터 바이올린을 배우던 중 1919년3.1만세운동에 적극 가담하였다가 일본 경찰의 감시가 심해지자 이를 피해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1924년 일본 와세다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할 때까지 바이올린 수업을 계속하였고, 1926년 독일 슈테르센 음악학교에서 유학을 마치고 1929년 귀국하여 4차례의 바이올린 독주회를 가졌다.

1932년 가곡 <고향>을 발표하였고 1937년 일제의 감시와 제재가 더욱 심해지자 서울 근교에서 은둔생활을 하면서 주로 민요 등 민족음악의 채보에 힘썼다. 1953년 부산 피난생활 중에 신병을 얻어 53세의 일기로 타계하였다. 작품으로는 <고향(그리워. 망향)>, <조국>, 독립축전곡>,<개천절>, <한글날>, <3.1절 노래> 이외에도 <진도아라랑>. <도라지타령> 등 수많은 곡이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홍교에 왔다.

주차시설은 건너편 도로변 옆에 있다.

 

 

 

 

 

 

홍교는 벌교포구를 가로지르는 다리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세 칸의 무지개형 돌다리다.

원래는 강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에 뗏목다리가 있었는데 조선 영조5년(1729)에 순천 선암사의 승려인 초안과 습성 두 선사가 지금의 홍교를 건립했다.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홍교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아름다워 보물 제304호에 지정되어 있다.

벌교(筏橋: 뗏목으로 잇달아 놓은 다리)라는 지명은 다름 아닌 뗏목다리로써 국어사전에 나와있는 보통명사다. 보통명사가 고유명사로  바뀌어 지명이 된 것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지 않을까 한다. 그러므로 뗏목다리를 대신하고 있는 이 홍교는 벌교의 상징일 수 밖에 없다.

소설에서도 이 근원성을 여러 각도에서 조명하고, 여러사건을 통해서 그 구체성을 은밀하게 보여주고 있다.

「김범우는 홍교를 건너다가 중간쯤에서 멈추어 섰다....... 그러니까 낙안벌을 보듬듯이 하고 있는 징광산이나 금산은 태백산맥이란 거대한 나무의 맨 끝 가지에 붙어 있는 하나씩의 잎사귀인 셈이었다. (태백산맥 1권 257쪽)

 

< 현지 안내문에서 >

 

 

 

 

 

홍교중수비군

 

 

 

 

 

 

홍교에서 벌교읍사무소쪽 도로를 따르면 유아원 건물이 있다.

이곳은 양의사가 후생병원을 운영했던 자리다. 그 병원은 둘로 나눠 팔렸었는데, 병원과 병동은 유아원으로 유지되다가 1995년 무렵 현대식 건물로 신축돼 지금도 어린이집으로 운영되고 있다.

병원의 안채쪽은 옛 일본식 건물 그대로 한동안 금남여인숙으로 경영되다가, 2007년 화재로 소실되었고 지금은 현대식 주택이 들어서 있다.

소설에서는 자애병원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자애병원의 전명환 원장은 단순히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충실히 지키는 의사만이 아니다.

그는 직업의 사회적 사명과 직업인의 사회적 임무가 무엇인지를 고심하면서, 우리들에게 모든 직업에는 인간을 최우선으로 해야 하는 사회적 사명과 임무가 있음을 일깨운다. 경찰과 좌익을 똑같이 치료하고, 좌익을 치료해준 죄로 재판에 회부되고, 국민 보도연맹에 강제로 가입되어 처형 직전에 살아나는 등 고초를 겪으면서도 또 정하섭을 치료해주는 그의 모습은 성자다.

 

<현지 안내문에서>

 

 

 

 

 

 

채동선음악당

벌교읍사무소와 붙어있으며 채동선 선생의 유품들로 전시된 전시실과 공연장 등이 갖춰져있고 뮤지컬, 영화상영 등 각종 행사가 개최된다.

 

 

 

 

 

 

현지 종사하는 분의 배려로 전시실을 둘러본다.

 

 

 

 

 

 

읍사무소 바로 앞에 위치한 고려회관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주 메뉴는 꼬막정식이지만 지금은 제철이 아니어서 맛조개 정식(1인분 20,000원,) 맛조개 백반(12,000원), 전복삼계탕(15,000원)을 추천한다.

 

 

 

 

 

 

중식후 보성여관에 들러 내부를 둘러보고 차한잔씩 하며 쉬었다 태백산맥문학관으로 왔다.

먼저 소화의 집을 둘러본다.

「조그만 하고 예쁜 기와집, 방 셋에 부엌 하나인 집의 구조 ....... 부엌과 붙은 방은 안방이었고, 그 옆방은 신을 모시는 신당이었다.부엌에서 꺽여 붙인 것은 헛간방이었다.」

소설 태백산맥에 나오는 무당 소화네 집의 모습이다. 당시의 무당집은 실제로 제각으로 들어서는 울 안의 앞터에 있었다. 집 둘레로는 낮춤한 토담이 둘러져 있었고, 뒤로는 풍성한 대나무숲이 집을 보듬듯 하고 있었다. 뒤란?으로 도는 길목의 장독대 옆에는 감나무도 한 그루 서 있는 소설에서 그려진 소화의 모습처럼 정갈하고 아담한 그런 집어었다.  1988년 무렵 태풍에 집이 쓰러졌고, 토담의 일부와 장독대의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밭으로 변했다. 그 후 주차장으로 사용하게 되면서부터 그 흔적 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을 2008년 보성군에서 복원하였다.

소설 태백산맥은 이 집의 신당에서 정참봉의 손자 정하섭과 무당 월녀의 딸 소화가 애틋한 사랑을 시작하는 것으로 길고도 아픈 이야기를 시작한다.

 

 

 

 

 

 

중도 들녘이 질펀하게 내려다보이는 제석산 자락에 우뚝 세워진 이 집과 제각은 본래 박씨문중의 소유이다. 이 집의 대문과 안채를 보면 한옥을 기본 틀로 삼았으되 곳곳에서 일본식을 가미한 색다른 양식의 건물로, 한시대를 반영하고 있는 꽤 흥미로운 건물이라 할 수 있다.

소설에서는 현부자네 집으로 묘사되었다.

<그 자리는 더 이를 데 없는 명당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는데, 풍수를 전혀 모르는 눈으로 보더라도 그 땅은 참으로 희한하게 생긴 터였다..........(태백산맥 1권 14쪽)>

소설 <태백산맥>이 문을 여는 첫 장면에서 처음 등장하는 집이다. 조직의 밀명을 받은 정하섭이 활동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새끼무당 소화의 집을 찾아가고, 이곳을 은신처로 사용하게 되면서 현부자와 이 집에 대한 자세한 묘사가 펼쳐지게 된다. 소화와 정하섭의 애틋한 사랑의 보금자리이기도 하다,

 

< 현지 안내문에서 >

 

 

 

 

 

 

 

 

 

 

 

 

 

조정래 태백산맥 문학관을 둘러본다.

소화의 집과 현부자네 댁은 광장을 사이에 두고 접하여 있는 셈이다.

 

 

 

 

 

 

 

 

 

 

 

 

 

 

 

 

 

 

 

 

 

 

 

 

 

 

 

 

 

 

 

 

 

 

 

 

 

 

 

 

 

 

비꽃

 

       벌교여자중학교 3학년 윤성지

 

 

안녕 그대, 잘 지내시나요

세월담은 그대 의자에 앉아 나, 이렇게 펜을 들었어요.

그대에게 전하지 못해 가슴 앓았던 지난날들이 떠올라서

안녕. 인사 한 마디에 담을 말이 많아 한참 고민하네요

 

그대여, 기억하시나요.

노란 개나리 손에 뒷짐 뒤고

그대 한 발자국 뒤에 따라 걷던 그때를.......

 

그대여 기억하시나요.

조용한 골목 가로등 불 아래에

서로가 눈 맞추어 하나가 됬었던 그때를.....

 

그대는, 기억하시나요.

나의 손 꼭 잡고 다시 돌아오겠다며

잡아 본 적 없는 총을 들고 전쟁터에 발을 들인 그대를............

 

마음 졸이면서 그대를 그리워했어요.

비 오는 날엔 해바라기를 걱정하고,

햇빛이 맑은 날엔 개나리를 떠올리며 그대를 사랑했어요,

수 없는 계절이 지나 시대가 변해도 나는 기억해요.

 

창 밖에는 비꽃이 떨어지기 시작했어요.

비가 쏟아지려나 봐요.

한껏 흐르는 내 눈물 그대에게 보여지고 싶지 않아

나, 마지막 마지막으로 그대 고운 이름 부르고 갈께요.

 

안녕 그대, 아름다웠던 우리 사랑 잊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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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은 주어진 언덕 위에 지어진다 하지만 언덕위의 하얀 집처럼 건축물이 두드러지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건축가의 기념비가 아니라 문학작품을 기념하고 담아내는 건축물이기 때문이다.

소설이 그려낸 분단의 아품은 산의 등줄기를 잘라내는 아품과 비견될 것이었다. 건축가가 산자락을 잘라내는  행동은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러나 나는 거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건물은 우리의 그 아픈 이야기가 묻혀있던 당 속에 있어야 했다. 그리고 그 등줄기가 잘라지는 아품을 그대로 보여주어야 했다.

땅을 파내려가 만든 토목옹벽이 건축물의 벽이 되었다. 나머지 한쪽 옹벽에는 소설을 그림으로 그리고자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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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대에선 중도 뜰이 훤히 내려다 보인다.

태백산맥 문학관 탐방을 끝으로 오늘 일정을 마무리 한다.

귀가길 잠시 틈을 내여 선암사를 둘러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