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지역의 산

김제 벽골제, 아리랑문학관, 정종수고택과 장화쌀뒤주, 정화암생가, 아랑문학마을과 하얼빈역

정헌의 티스토리 2024. 9. 17. 16:23

■김제 벽골제, 아리랑문학관, 정종수고택과 장화쌀뒤주, 정화암생가, 아리랑문학마을과 하얼빈역

 

벽골제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쌓아만든 최고의 고대 저수지이나 후대에 없어지고 현재는 벽골제공원을 조성해 벽골제를 기념하고 있다. 주변에 아리랑 문학관, 창작스튜디오, 국립청소년농생명센타 등이 있다.

여타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엿겠지만 특히 김제, 군산 등 전라지역은 일제시대 농업수탈이 심했고 이러한 상황은 소설로도 알려졌다. 이를 기억하기 위해 유명작가에 대하여 문학관을 조성헸다.

한 사람에 대한 문학관이 2곳 이상 건립된 작가도 3명이나 있다. 일제의 수탈사만을 다룬 것은 아니지만 토지를 쓴 박경리씨는 통영과 원주에 문학관이 있고, 태백산맥과 아리랑의 작가 조정래는 보성(벌교)과 김제에, 혼불의 작가 최명희는 남원과 전주에 각각 문학관이 있다.

장화쌀 뒤주도 어려운 시대 이웃을 돕던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이다.

 

 

▷탐방코스

벽골제 - 아리랑 문학관 - 정종수고택과 장화 쌀 뒤주, 정화암생가 - 아리랑문학마을. 하얼빈역

 

 

▷탐방후에

▣김제 벽골제

 

도로 건너편엔 주차장,  아리랑문학관, 창작스튜디오, 국립청소년농생명센타가 있다.

6번, 7번으로 표시된 곳이 주차장이다, 

 

 

 

 

 

김제의 대표적인 공원으로, 이곳에서 매년 지평선축제가 열린다.

현지의 안내 팜플릿에는 벽골지문을 신정문으로 표시되어 있고, 다른쪽에  구정문이 있다.

 

 

 

 

 

입장료는 3,000원 (김제시민. 경로 등등은 무료)

추석연휴기간으로 2024. 9. 14~9.19일까지 무료입장이다.

 

 

 

 

 

벽골문(신정문)을 들어서면 지평선 맛집 장터(빈 공간의 건물임, 축제때 장터가 들어 설 곳임)가 있고 좌측편으로 상설체험장이 있다.

이곳은 공예체험장이다.

 

 

 

 

 

공예체험장 내부

주로 한지를 이용한 공예체험이다.

 

 

 

 

 

민속놀이 상설체험장 주변이다.

 

 

 

 

 

민속놀이 상설체험장엔 한복체험관, 쌀음식체험관, 명인학당, 전통가옥숙박체험장, 짚풀공예체험장, 민속놀이도구공방등이 있다.

 

 

 

 

 

짚풀공예품과 주변을 둘러보고,

 

 

 

 

 

명인학당으로 왔다.

솟을대문엔 도의문(道義門) 현판을 달고있다.

 

 

 

 

 

명인학당 (明仁學堂)

조선시대의 사학(私學)인 서당을 배경으로 우리 전통문화를 통해 충효와 인.의.예.지 정신을 넓히고 밝히자라는 의미로 명인학당이라 지었다. 생활 속 지켜야 할 기본예절과 유교사상을 바탕으로 한 인성교육, 한문교육 등을 실시하고 있으며, 전통혼례식을 체험할 수 있다.

 

 

 

 

 

명인학당은 동헌과 장생문으로 연결되어 있다.

 

 

 

 

 

동헌내아.

 

 

 

 

 

이정직 생가

 

석정 이정직(1841~1910)은 김제출생으로 성리학과 실학을 공부하고 28세때 청나라에 파견된 조선 사절 연경사 이봉구 수행원으로 북경에서 1년간 체류하며 동서양의 사상서를 탐독하고 중국 명사였던 유상, 탁경염 등과 교류한 뒤로 전통유학자이지만 신물물 흡수로 사상적 기반과 학문, 예술이 풍부해졌다.

매천 황현(1855~1910), 해학 이기(1848~1909)와 더불어 호남삼걸로 불린 분으로 당대는 물론 전라북도 화단에 큰 영향을 끼친 문인화가라고 한다.

김제시 백산면 상정리 요교마을에 생가가 있으며, 이정직 선생 집안은 대대로 경기도 김포에 살았지만 선략장군사과(정6품 관직)를 지낸 부친이 당시 시국의 참상에 관직을 버리고 김제로 이거해 살며 선생을 비롯해 3남매를 낳은 곳이라 한다.

선생의 부친이 김제로 이거는 1830년대 후반으로 보이며 당시 조선23대 순조에서 24대 헌종시대로 천주교 포교가 이뤄지면서 1839년 서양인 신부 3명을 비롯100여명이 사망한 기해박해가 일어나는 등 어지러운 시국이었다.

<김제시 공식블로그에서 발췌>

 

 

 

 

 

동헌내아, 석정 이정직 선생 생가를 둘러보고 나오면

 

 

 

 

 

농경사주제관 및 체험관이 있다.

농경사 주제관 옥상에 전망대가 있어 주변을 한눈에 볼 수있다.

 

 

 

 

 

농경사주제관에 왔다.

 

 

 

 

 

2층의 농경사주제관은 어린이 용이다.

 

 

 

 

 

옥상으로 왔다.

한쪽에 엘리베이터가 있어 이를 타고 올라도 되고, 계단을 따라 올라도 된다.

2층 한쪽은 카페이다.

 

 

 

 

 

전망대에 오르면 남쪽으로 논체험장이 내려다 보인다.

"다같이 행복해요"

 

 

 

 

 

서쪽으로, 높은 탑이 보이는 곳이 국립청소년농생명센터.

그 좌측에 아리랑 문학관이 있다.

 

 

 

 

 

북쪽

가까운쪽에 보이는 건물이 백천미술관인지 모르겠다.

 

 

 

 

 

동쪽

생태숲으로 연못과 소나무 숲이 있다.

 

 

 

 

 

벽골제는 서기330년(삼국사기에 신라 흘해왕 21년에 처음으로 벽골제를 만들었는데 둘레가 1,800보라는 기록이 있으나 이 지역이 백제땅이었으므로 백제 11대 비류왕 27년으로 보아야 할 것임./ 문화유산포털사이트), 김제 동쪽 모악산에서 서해로 펼쳐진 충적평야의 병목에 남북방향으로 설치한 토제제방이다. 동부 모악산을 수원으로 벽골제를 통해 서부 평야에 물을 공급하였으며, 현재 약 2.5km의 현존 제방이 관리되고 있다.

문헌에 따르면 벽골제는 330년 삼국시대 축조되어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국가적인 차원에서 지속적으로 유지 관리되었다. 인터넷 문화유산 포털 사이트에는 언제인지는 모르나 좋은 점보다 나쁜점이 더 많다고 하여 없어지고 말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 태종 15년 제방을 다시 쌓았다 하므로 이보다는 이후 일 것이다)

일제강점기인 1925년 동진수리조합이 제방의 일부를 훼손하여 농업용 용수로로 개조하였고 2021년까지 문화유산과 용수로의 기능을 병행하였다.

벽골제는 수여거, 장생거, 중심거, 경장거, 유통거의 5기 수문이 있으며, 학술조사를 통해 위치가 확인되었다. 제방의 길이는 약 3.8km에 이른다.

벽골제는 김제 만경평야에 1,700여년간 자리하며 대한민국 고대 수리시설 및 농업유산의 가치를 대표한다.

<안내문, 국가유산 포탈 사이트>

 

 

 

 

 

벽골제 저수 추정도

현 저수지 내의 저수지역을 알기 어렵고 제방의 전장 약 2.6km가 유지관리되고 있음 외에는 일반인이 읽어보아도 뭔말인지 알기 어렵다,

 

 

 

 

 

야외 생태숲의 연지로 왔다.

데크길을 걸어보기 위함이다.

 

 

 

 

 

이번엔 둑방을  따라 간다.

둑방 초반은 풀이 무성하여 다니기 어려우나 중간 이후엔 길이 된다,

 

 

 

 

 

쌍룡

 

 

 

 

 

김제 벽골제와 김제간선 벽골제구간 용수로

 

알재강점기 1925년, 일제의 식량증산 정책의 일환으로 김제, 정읍, 부안평야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동진수리조합이 설립되었다. 동진수리조합이 운암제 용수사용을 위한 용수로 설치 과정에서 벽골제 제방을 편입 개조하였고 초축제방의 동측사면이 훼손되었다. 이후 김제 벽골제는 문화유산이자 김제 간선 벽골제구간 용수로로서 2021년까지 그 기능을 병행하였다,

현재는 문화유산 보존을 위해 벽골제 동측으로 새로운 용수로가 신설 개통 되었다.

현재 문화유산과 한 몸을 이루었던 용수로를 어떻게 정의하고 정리할 것인지를 의제에 포함하여 김제 벽골제 사적종합정비계획이 추진 중이다.

<현지 안내문에서>

 

 

 

 

 

장생거

5게의 수문중 하나인 셈이다.

 

 

 

 

 

둑방길

 

 

 

 

 

중수비

사적제111호 벽골제의 지정 내용에는 현존 제방 약2.5km와 더불어 1415년 중수를 기늠하는 별골제 중수비가 포함되어 있다고 하며, 원래 위치는 신털미산 정상부이나 1980년 유적을 정비하면서 현재 위치로 이전하였다고 한다.

신털미산은 현 벽골제공원 북쪽으로 접한 원평천 내의 섬 안에 위치한 조그만 동산으로 높이는 해발 15.9m이다.

 

 

 

 

벽골제 농경문화 박물관으로 왔다.

 

 

 

 

 

농경문화박물관은 농경문화관과 디지털영상관, 기획전시관으로 나눠져 있다.

농경문화관이 가장 규모가 크다.

 

 

 

 

 

먼저 농경문화관을 둘러본다.

 

 

 

 

 

세시풍속

1월 첫날 설날, 2월 초하루 머슴날(중화절이라고도 함),  3월3일 삼짓날, 4월 초파일, 5월 5일 단오, 6월 15일 유두날(맑은 개울물을 찾아가 목욕하고 음식을 즐김, 더위를 먹지않는 다고 함),  7월 보름 백중( 7월 7일은 견우와 직녀가 은하수를 건너 만난다는칠석으로 견우,직녀성에 제사지냄. 백중은 농악을 울리며 하루를 즐김.)

8월 보름 한가위 또는 추석, 9월 9일 중양절, 10월 상달, 11월 동짓달, 12월 섣달

 

 

 

 

 

 

 

 

 

 

 

 

 

 

 

 

 

 

 

디지털 영상관

 

 

 

 

 

기획전시실로 왔다.

 

 

 

 

 

기획전시실엔 부엌이야기, 정성스럽게 준비하는 식사를 위한 취사도구, 음식물을 나르거나 정장하는 운반도구와 저장도구, 다양한 형태의 음식물 가공 도구 등을 분야별로 진열 진시하고 있다.

 

 

 

 

 

단야각

 

통일신라 제38대 원성왕때 벽골제가 축조된 지 오래되이 나라에서는 토목 기술자인 원덕랑을 급파하였다. 원덕랑이 벽골제에 도착하여 보수공사에 힘쓰는 동안, 지역 태수의 딸 단야(丹若)는 원덕랑을 흠모하게 되었다. 한편, 큰 공사에는 '용추에 사는 청룡과 백룡에게 제물을 바쳐야 공사가 순조롭다' 는 속신이 있었는데, 원덕랑이 이를 무시하고 공사를 진행하니 백성들 사이에서는 공사에 대한 우려가 번져가고 있었다.

그때 원덕랑의 약혼녀 월내가 김제 벽골제에 이르자, 태수는 딸 단야의 사랑을 이루어 주기 위하여 월내를 보쌈하여 제물로 바치고 보수 공사도 완공시키겠다는 음모를 꾸미게 되었다. 아버지의 계략을 알아챈 단야는 자신을 희생하여 제방도 완성하고 원덕랑과 월내를 결합시키며, 또한 아버지의 살인도 막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스스로 용의 제물이 되었고, 벽골제는 무사히 완공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 근거하여 김제시에서는 최근 단야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단야의 영정을 단야각에 모시고 있으며 단야의 이름을 딴 누각인 단야루를 세우고 주변을 단야광장이라 이름 붙였다.

 

 

 

 

단야루

 

 

 

 

 

벽골탑

이웃하여 조정래 대하소설 아리랑 문학비도 있다.

 

 

 

 

 

풍년기원제단 뒤에 웬 거시기를?

 

 

 

 

 

소를 테마로 한 공원도 만들었다.

 

 

 

 

 

벽천미술관으로 간다.

 

 

 

 

 

벽천미술관

 

 

 

 

 

 

 

 

 

 

 

 

 

 

 

 

 

 

 

벽천 나상곡(1924~1999)

 

전북 김제출신

국전 추천작가, 국전심사위원장 역임

원광대학교 미술대학(원) 교수, 학장, 명예교수 역임, 명예철학박사

 

 

 

 

 

이곳 전시실에서는 <사제동행, 같은 길을 나아가다>라는 주제로 기획전시가 열리고 있다.

1999년 벽천미술관 건립 당시 벽천 선생 문하 제자들이 기중한 46점 중  23점을 선별해 기획전을 열고 있다.

 

 

 

 

 

 

 

 

 

 

 

 

벽골제 쌍룡

대나무로 만들었다.

 

 

 

 

 

우도농악교육전수관

문이 닫혀있어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식당가.

도로와 접하고 있다.

 

 

 

▣아리랑 문학관

 

아리랑 문학관으로 왔다.

벽골제 공원과는 도로를 사이에 두고 있다.

 

 

 

 

 

안내하시는 분이 천천히 둘러보라며 1전시실 부터 안내한다,

참 친절하시다.

 

 

 

 

 

초록빛 싱그러움을 뒤덮으며 들판에는 갯내음 짙은 바람이 불고 있었다.

거칠게 휘도는 바람을 앞세우고 탁한 회색빛 구름이 바다 쪽에서 몰려오고 있었다.

시커먼 먹구름은 하늘을 금방금방 삼켰다.

그리고 그 두껍고 칙칙한 구름덩어리들은 서로 얽히고 설켜 꿈틀대고 뒤척이며 뭉클뭉클 커져가고 있었다.

<아라랑 1권 中>

 

 

 

 

 

1부, 아! 한반도

2부, 민족혼

3부, 어둠의 산하

4부, 동트는 광야에 대한 소개가 주류를 이룬다.

 

 

 

 

 

지구를 세바퀴 이상 돈 발길

 

나는 태백산맥을 마흔 살에 시작했는데 이제 쉰 살이 넘어있다. 그 세월 속에는 아리랑을 준비한 기간이 들어있고, 또 태백산맥을 쓰기 전에는 그것을 준비한 기간이 놓여 있다.

그러니까 두 작품에 바친 세월은 15년이 넘는 것이다. 먹거 자고 쓰는 글감옥의 세월로 나를 밀어 넣은 것은 나 자신이었다. 왜 그랬는가?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나는 태백산맥을 구체적으로 취재하던 80년대 초에 벌써 식민지시대를 배경으로 대하소설을 쓰기로 하고 태백산맥과 함게 아라랑의 제목을 정해두었던 것이다. 나는 그 짐을 빨리 벗어야 했다.

둘째는 소설 쓰는 기간을 최대한 단축하자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대하소설이 쓰는 기간이 길어지면 후반으로 갈수록 소설적 긴장을 상실하는 경우가 흔한데 그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였다.

셋째는 전업작가로서 이 세상의 모든 노동자들이 기본적으로 하고 있는 만쿰의 노동은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네째는 계획해둔 작품들이 많아 하루라도 빨라 아라랑을 써버려야 했다.

그리하여 태백산맥과 아리랑을 쓰면서 내 장년 15년의 세월은 흘러갔고 나는 이제 글감옥에서 10년 8개월만에 가출옥한 기쁨을 맛보고 있다.

 

 

 

 

제2전시실로 왔다.

구상과 집필

 

 

 

 

 

취재,

국내, 중국, 러시아, 아시아, 하와이

 

 

 

 

 

아리랑문학기행 안내도

 

망해사, 심포항 횟집단지, 성모암, 청운면 청운사, 백구면 신작로,

김제평야, 김제 동헌, 장화쌀뒤주,

벽골제, 월촌입석, 김제전교비,  증산교, 동심원, 금산교회, 금산사, 귀신사

 

 

 

 

 

제3전시실

작가 조정래에 대한 소개다.

 

 

 

 

 

사진으로 보는 작가의 인생과 각종 상패, 도서 소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작가 연보,

작품 연보도 있다.

 

 

 

 

 

제4전시실

 

 

 

 

 

필사 원고를 모아두었다.

 

 

 

 

 

아리랑 문학관을 개략적으로 둘러보았다.

 

 

 

 

 

벽골제 창작스튜디오

글자 그대로 창작스튜디오라서 관광객이 둘러볼만한 곳은 아니라고 한다.

 

 

 

 

 

주변,

 

 

 

 

 

 

 

 

 

 

 

 

국립청소년농생명센터

 

 

 

 

 

아리랑문학관과 벽골제 주차장을 잇는 지하보도

 

 

 

 

 

 

에스컬레이트에  계단까지 첨단 시설이다.

이런 시골 한적한 도로에 자하 보도를 만들고 에스컬레이트까지 설치했다.

황단보도만으로도 충분할 곳인데.......

 

 

 

 

▣신털미산 (15.9m)

 

신털미산은 벽골제 인근에 위치한  강속의 섬에 위치한 해발 15.9m의 조그만 동산이다,

도로가 섬을 양분하고 있으며 사진상 이곳은 신털미산 반대쪽이다.

명칭 유래 등으로 볼때 웬만하면 신털미산에 올라볼까 하고 왔는데 오르는 입구나 산의 상태가 신통찮고 사진 촬영도 귀찮아 받대쪽만 한 컷 했다.

 

 

 

 

 

▣정종수고택과 장화쌀뒤주

 

정종수 고택에 왔다.

대문 한켠에 김제시 맛조이 지정농가로 표시되어 있다. 

"김제 후장마을에 정구례로 널리 알려진 집인 김제시 맛조이 지정농가 정종수 고택...."

정구례는 뭐고 맛조이는 뭔지 모르겠다.

문패에는 정주철, 유순례 이름이다.

 

 

 

 

사랑채이자 아랫채

 

 

 

 

 

창고인가?

 

 

 

 

 

집터는 너르지만 건물은 안채와 아랫채, 창고, 뒤주가 전부이다.

 

 

 

 

 

장화리 쌀뒤주 /전북민속문화유산

 

이 쌀뒤주는 조선 고종(1863~1907) 때 만든 것으로 이곳에 거주하는 정종수씨가 보존하고 있다.

옛날 정씨 집안은 조상 대대에 걸쳐 만석군으로 불리우던 큰 부호였다. 부자인만큼 인색하지 않아 매일 수백명의 손님이 찾아와 머물렀다.

많은 사람의 식사를 해결하기 위해 집 안마당에 거대한 쌀뒤주를 만들었는데, 가득 채우면 70가마의 쌀이 들어갈 정도였으나 이것도 한달 식량이 채 못되었다고 한다.

나무로 만든 사각형 뒤주는 높이 1.8m이며, 일반 건물처럼 위에는 초가지붕을 얹고 아래에는 주춧돌을 놓았다. <현지 안내문에서>

현 뒤주의 상태가 양호하여 당시 만든것인지는 의문스럽다.

 

 

 

 

안채

후대에 와서 많이 개축하였는지 고색미나는 한옥은 아니다.

 

 

 

 

 

노거수 향나무에서 이집의  역사를 읽는 것 같다.

별다른 안내문은 없다.

 

 

 

 

 

정종수 고택 대문밖 소로 건너편에  효열각이 있다.

효자 정지형 정려, 정항석 처 김제정씨 정려, 정방섭 처 광주이씨 정려의 편액을 볼 수 있다.

이 마을은 정씨집안의 집성촌인가 싶다.

 

 

 

 

▣정화암 생가.

 

정종수 생가 좌측 뒷편에 있는 집이다.

정종수 생가 골목입구 삼거리(사거리)에서 정종수 생가를 우측에 두고 골목길을 따라 쬐끔 진행하면 있다.

 

 

 

 

 

정화암 생가 /국가보훈부 지정 현충시설

 

이곳은 3.1운동에 참여하고 국외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했던 정화암 선생의 생가이다.

1896년에 김제에서 출생한 선생은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고, 1920년 미국의회사절단이 내한했을 때 일본의 침략상을 알리는 활동을 하다 경찰의 추격을 받아 1921년 중국 북경으로 망명하였다.

망명 이후 이희영, 신채호 등과 교류하며 무력투쟁을 통한 광복 쟁취를 위해 폭탄 제조 기술을 습득하고 군자금 확보 방안을 강구하였다. 이러한 활동의 일환으로1928년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고, 1931년에는 흑색공포단을 조직하여 일본 공사관에 폭탄 투척 등 무력 항쟁을 지속하였다.

1933년 이강훈, 백정기 등과 함께 상해해방연맹을 결성하고, 1936년 남화연맹의 기관지인 남화통신을 발간하기도 하였다. 이후 임시정부의 시책에 협조하여 1940년부터 상해 방면에서 활동하며 광복군의 현지 책임자로 미.영 포로수용소의 소재지를 확인하여 보고하는 등 정화 활동에 기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8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으며, 2013년 선생의 생가를 현충시설로 지정하였다.

<현지 안내문에서>

 

 

 

 

 

▣ 아리랑문학마을

 

 

아리랑 문학마을로 이동했다.

일제수탈관, 일제수탈기관,  내촌 외리마을과 살짝 떨어져 하얼빈역사. 이민자 가옥등이 았다.

건물의 배치가 비교적 단순하여 어렵지 않게 둘러볼 수 있다.

 

 

 

 

먼저 아리랑 문학마을을 둘러본다.

 

 

 

 

 

들어서면 이내 만나는 방문자 쉼터

관리사무소는 2층에? 있는지 모르지만 현관엔 프론트데스크도 안내원도 없다.

 

 

 

 

1전시실부터 둘러본다.

 

 

 

 

 

 

 

 

 

 

 

 

수탈의 홈통 -

토지 강탈  / 만주로 가는 것이 좋아서 가나. 전답을 뺏겼응께 울면서  가제

식민지 소도시의 탄생

식민지 교육과 종교 순서로 설명되어 있다.

 

 

 

 

 

 

 

 

 

 

 

 

수탈경제의 유혹

수탈. 전쟁 일억총옥쇄

저항과 항전

 

 

 

 

 

인력거 뒷편에서 영상을 시청할 수 있다.

 

 

 

 

 

구둣발에 짓밟히고 까이는 모습을 조형물로 표시하였다.

 

 

 

 

 

우리는 지난 20세기의 전반에 무려 40여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일제의 식민지배를 받았습니다.

아직까지 식민지배가 남긴 상처가 사회 전반에 광범위하게 남아있어, 21세기인 지금도 막대한 비용을 지불하는 중입니다. 그리고 일제 청산이라는 과제도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기억되지 못한 역사는 반복될 수 있습니다.

 

이 땅에 식민지라는 칠흑의 어둠이 반복되지 않도록 식민지배의 역사는 반드시 제대로 정리되고, 식민지배의 고통은 지속적으로 상기되어, 항구적인 자주독립의 자양분이 되어야 합니다.

 

그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2층으로 왔다.

 

 

 

 

 

조정래 작가의 대하소설 <아리랑>은 일제 침략기부터 해방기까지 한민족의 끈질긴 생존과 투쟁, 이민사를 다룬 민족의 대서사시와 같은 작품이다.

한국일보에 원고지 2만 매의 분량으로 연재된 아리랑은 제1부 <아, 한반도>, 제2부 <민족혼>, 제3부 <어둠의 산하>, 제4부 <동트는 광야>의 전체 4부로 구성되었다. 1995년 완간되어 해방 50주년의 의의를 더했으며, 지금까지 4백여만 독자들에게 널리 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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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한국 근현대사 3부작

 

아리랑

일본 식민시대에 민족의 수난과 치욕 그리고 치열하고 끈질긴 투쟁을 총체적으로 형상화한 역작 <아리랑>은 일본과 만주, 하와이와 미주, 연해주,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민족의 유랑과 투쟁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일제의 갖은 핍박과 수탈에 따른 무수한 소작농들의 수난과 여러 계층의 전형적 주인공들의 고난에 찬 삶을 통해 우리가 세계 식민사에서 가장 혁혁하게 투쟁했음을 감동적으로 실감케 한다.

 

태백산맥

광복과 함께 온 민족의 비극인 분단시대의 이데올로기 갈등과 고통과 처절함을 다룬 태백산맥은 한국 소설사 100년 동안애 가장 폭넓게, 가장 많은 독자들을 만난 소설로 꼽힌다. 그리고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고발 당한 필화사건으로 만 11년 동안 수사받고 결국 무혐의 처분을 받은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그 무혐의 처분은 태백산맥이 이룩한 객관적 진실의 미덕이며, 민족통일문화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필연성이며, 왜 태백산맥이 민족사와 함께 할 소설로 일컬어지는지를 입증한다.

 

한강

한강은 분단과 전쟁의 상처가 낭자한 폐허속에서 시작된 경제개발이 야기시킨 수많은 문제점들과 모순을 갈파하면서 천민자본주의의 도래를 밝혀 한국 사회의 미래를 조망하는 동시에 경제 발전의 도정과 그 주역들이 누구였는지 생생하게 드러내 모두가 자각과 긍지를 갖게 한다. 그리고 분단시대의 계속으로 그 상처가 우리 사회에 얼마나 크고 깊은 상처를 남겼는지도 동시에 구체화하며 암장된 역사 진실을 밝혀내 우리들의 역사 책임을 묻고있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 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결음 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에. 일이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으로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떼에 떠날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곡조를 못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임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님의 침묵  / 한용운 시

 

 

 

 

아리랑

일제강점기에는 애국가로도 불리워졌기 때문에 그 40여년 세월의 민족 수난과 항쟁을 그려낸 소설의 제목이 된 것은 필연이었다고 작가는 회고한다.

 

 

 

 

 

아리랑문학마을 일제수탈관을 둘러보고 하얼빈 역으로 간다,

 

 

 

 

 

이민자 가옥

안내표지판의 글자는 판독이 불가하다.

 

 

 

 

 

하얼빈 역

 

하얼빈 역은 중화인민공화국 헤이룽장 성  하얼빈 시 난강 구의 철도역이다.

1899년 10월, 쑹화장 역(쑹화 강 역)으로 개업했으며, 1903년 7월, 하얼빈 역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사건으로 유명하며, 기념관이 설치되어 있다.

 

 

 

 

 

 

 

 

 

 

 

 

빼앗기는 혼

빼앗기는 땅

구국의 혼 의병

쫓겨가는 사람들

 

 

 

 

 

 

 

 

 

 

 

 

뒷편 복합영상관이 있다.

 

 

 

 

 

제2전시실

 

 

 

 

 

해바라기 군상

 

 

 

 

 

끌려가는 사람들

 

 

 

 

 

 

 

 

 

 

 

 

하얼빈 역을 대충 둘러보고,

아리랑문학마을 일제수탈관쪽으로 되돌아 간다.

 

 

 

 

 

일제 수탈관주변에 광장과 내촌, 외리 마을을 복원했다.

 

 

 

 

 

지삼출

 

머슴 출신으로 감골댁 남편과 동학 농민군으로 투쟁했던 빈농 출신으로 강직하고 굽히지 않는 성격이며, 격동의 시대를 꿋꿋하게 산 인물, 감곡댁과는 서로 가족처럼 의지하며 살아간다.

방영근의 하와이 이민금을 장칠문이 속여 떼어 먹자 그를 폭행하고는 경부선 철도 공사장의 강제노역에 끌려간다. 풀려나온 뒤에는 송수익을 따라 의병활동을 하며 의병이 해체되자 군산에서 부두 노동자로 일하다가 수국이의 일로 방대근과 함께 백남일을 폭행하고 만주로 이주한다. 송수익을 평생 옆에서 모시고 독립군으로 살며 해방을 갈망하는 독립투사의 초상이다.

<현지 안내문>

 

 

 

 

 

광장

저쪽으로 내촌.외리마을을 재현했으나 멀리서 본다.

 

 

 

 

 

죽산면사무소

 

 

 

 

 

죽산주재소

 

 

 

 

 

주재소 내부

 

 

 

 

 

죽산정미소

 

 

 

 

 

대충 모양새를 갖췄다.

 

 

 

 

 

죽산우체국

 

 

 

 

 

 

 

 

 

 

 

 

죽산우체국을 끝으로 아리랑 마을을 대충 둘러보고 오늘 일정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