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곡 구상문학관, 신나무골성지, 매원마을(감호당,지경당, 혜원고택, 광주이씨 박곡종택 등 ), 송정휴양림
칠곡 두번째 일정입니다.
6월 3일 가산 수피아로부터 복만이네, 구 왜관터널 및 철도.호국공원과, 성베네딕도회 수련원, 가실성당 등을 둘러본 적이 있습니다. 당시 미쳐 가보지 못한 몇 군데를 둘러보기 위해 다시 찾았습니다.
당일 문이 닫혀 둘러보지 못한 구상문학관 내부와 기독교의 대구 전파과정에서의 신나무골 성지, 옛 한옥마을이라 할 수 있는 매원마을과 송정휴양림을 차례대로 둘러봅니다.
칠곡 호국평과기념관과 이웃한 꿀벌나라테마공원, 향사아트센타, 공예테마공원은 서로 접하여 있으며, 제법 거리를 두고 회당 장석영 선생 생가와 녹리당, 말하는 은행나무까지 둘러보는 것으로 하루 일정이 됩니다. 사진 양이 많아 이는 다음 편에 별도로 올립니다.
▷일정
칠곡 구상문학관, 신나무골성지, 매원마을(감호당,지경당, 혜원고택, 광주이씨 박곡종택 등 ), 송정휴양림 / 2026. 6. 14.
▷탐방후에
◐ 구상 문학관

구상 문학관을 다시 찾았습니다.
2026. 6.3일 오후 5시 30분경 이곳을 찿았을 때에는 문이 닫혀있어 내부에 들어가 보지 못했기에 오늘 인근을 지나는 길에 잠시 둘러보기로 합니다.

때마침 점심시간대에 찾아서 이곳 직원에게 미안한 마음입니다.
들머리 북카페가 있어 조용히 독서하며 쉬어가기에 참 좋을 것 같습니다.

구상 선생은 1919년 9월 16일 서울 종로구 이화동에서 출생하여 1923년 함경남도 문천군으로 이주하여 젊은 시절을 그곳에서 보내게 뵙니다.
1953년 6.25직후 칠곡군 왜관에서 20여년 거주하다 2004년 5월 작고하였습니다.

구상문학관은 2층의 건물로 1층 전시관에는 구상 시인의 삶과 문학세계가 전시되어 있고, 2층에는 구상선생이 기증한 많은 도서가 진열되어 있습니다.

작품연보와 저서들

구상 선생은 응향필화사건으로 북한에서 탈출 월남했다. 당시 서울에서 민족문화가동맹에 입참하여 활동하다가 지병인 결핵이 재발하여 설창수 선생의 주선으로 마산결핵요양원으로 내려와 치료 후 병세가 호전되어 진주에서 활동하다가 6.25전쟁이 발발하여 당시 원산 덕원에 있던 성 베네딕도 수도원이 왜관으로 피난을 온다는 소식을 듣고, 현재의 문학관 자리에 안착했다.
대구매일신문 고문, 영남일보 주필, 효성여자대학교에 출강하면서 지냈다. 왜관에서 약 22년간 활동하다가 서울로 이거하여 영등포 여의도 시범아파트에서 영면에 들었다.
원산 문학과 동맹과 응향 필화사건
구상 시인이 일본 동경에서의 학생 생활을 마친 것은 1941년이었다. 귀국 후 구상 시인은 북한 함흥에 북선매일신문의 기자가 되었다. 1946년 초 원산의 문학도들은 북로당이 각 직업 동맹과 더불어 직능 단체 조직에 나서자 그 일환으로 원산 문학가 동맹을 발족하였다. 당시 구상 시인은 신문 지면이나 동인지에 작품 발표를 하고 있었으므로 자동으로 문맹의 일원이 되었으나 공산당의 조직 사업이나 선전 행사는 일체 외면하고 원산여자사범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그 무렵 구상 시인은 원산문예총의 위원장으로부터 해방 기념 시집 발간에 작품을 제출해 달라는 간곡한 청탁을 받았다. 아무리 공산당 치하지만 해방 후 첫 시집이라는 의의와 문학 동인들과의 우애도 있고 하여 <여명도>, <길>, <밤>등의 작품을 제출하였고 이는 시집 <응향>의 권두에 실렸다. 그 시집의 장정은 이중섭이 맡았으며 표지 그림은 군동상(群童像)이었다. 그러자 북한의 신문과 방송에선 <응향>을 규탄하는 결정서를 발표함과 동시에 원산을 비롯한 각 지방 동맹에 총체적인 검열 사업을 벌일 것을 공고하였다. 당시 가장 문제 삼은 것과 공격의 대상은 구상 시인의 시편들이었는데, 그것은 구상 시인의 시 자체가 그들의 눈으로는 예술지상주의적일 뿐 아니라 출신 성분이나 행동이 반동적이었기 때문이다. 백인준이라는 자의 논평에 의하면 퇴폐주의적이며, 악마주의적이요, 부르조아적이요, 반 역사적이요, 반 인민적이요 등 도합 7개의 수식이 붙은 죄목이었다. 그 필화를 입고 1947년 2월 구상은 탈출 월남하였다. 월남한 지 한달 남짓 후 <응향>사건은 남로당계 문학가 동맹의 기관지 제3호에 대서특필 보도되었고, 이에 대해 민족진영에선 김동리를 비롯하여 조연현, 곽종원, 임긍재 등이 반론 및 항의에 나섰다.
구상 시인은 최태응이 편집하던 <해동공론>에 '북조선 문학 여담'이란 제목으로 사건의 경위를 발표하였으며, 당시 우익진영의 유일한 문학지인 <백인>에 <발길에 채운 돌멩이와 어리석은 사나이와>라는 시를 발표함으로써 서울 문단에 입참하게 되었다.
<현지 내용에서>

하와이 사생초
나의 바다는 오늘도 태질을 친다.
'와이키키'바다야 너는 가슴을 살랑대는 바람도
나를 송두리째 뒤엎은 태풍도 그 정체를 몰라 그런다.
선머슴의 크레용 그림마냥
붉은 고슴도치 해 함박웃음의 달
떠가는 바위구름 색동 무지개
그리고 잠자리비행기가 한 하늘에 다 있다.
나도 그 아래선 마음 놓고
대낮에 꿈꾸는 짐승이 된다.

선생의 소장품들
노경(老境)
여기는 결코 버려진 땅이 아니다.
영원의 동산에다 꽃 피울
신령한 새싹을 가꾸는 새 밭이다.
젊어서는 보다 육신을 부려왔지만
이제는 보다 정신의 힘을 써야 하고
아울러 잠자던 영혼을 일깨워
형이상의 것에 눈을 떠야 한다.
무엇보다 고독의 망령에 사로잡히거나
근심과 걱정을 道樂으로 알지 말자
고독과 불안의 새로운 차원의
탄생을 재촉하는 은혜이어니
육신의 노쇠와 기력의 부족을
도리어 정신의 기폭제로 삼아
삶의 진정한 쇄신에 나아가자.
관능적 즐거움이 줄어들수록
인생과 자신의 모습은 또렷해지느니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더욱 불태워
저 영원의 소리에 귀 기울이자.
이제 초목의 잎새나 꽃처럼
계절마다 피고 스러지던
무상한 꿈에서 깨어나
죽음을 넘어 피안에다 피울
찬란하고도 불멸하는 꿈을 껴안고
백금같이 빛나는 노년을 살자.

상훈
1955년 금성화랑 무공훈장
1957년 서울시 문화상
1970년 국민훈장 동백장
1980년 대한민곡 문학상 본상
1993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2004년 금관 문화훈장

농민문학소설가 이무영
방랑의 마음 공초 오상순
아동문학가 마해송
시인 김광균
천재화기 이중섭

강
강은 과거에 이어져 있으면서
과거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강
강은 과거에 이어져 있으면서 과거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강은 오늘에 살면서 미래를 산다
강은 헤아릴 수 없는 집합이면서 단일과 평등을 유지한다.
강은 스스로를 거울같이 비워서 모든 곳의 제 모습을 비춘다
강은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가장 낮은 자리를 택한다.
강은 그 어떤 폭력이나 굴욕에도 무저항으로 임하지만 결코 자기를 잃지 않는다
강은 뭇생명에게 무조건 베풀고 아예 갚음을 바라지 않는다.
강은 스스로 스스로를 다스려서 어떤 구속에도 자유롭다.
강은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면서 무상 속의 영원을 보여준다,
2002년 5월
시 구상
글씨 이길상



인류의 맹점(盲點)에서
시방 세계는 짙은 어둠에 덮여 있다.
그 칠흑 속 지구의 이곳 저곳에서는
구급을 호소하는 비상 경보가 들려 온다.
온 세상이 문명의 이기(利器)로 차 있고
자유에 취한 사상들이 서로 다투어
매미와 개구리들처럼 요란을 떨지만
세계는 마치 나침반이 고장난 배처럼
중심도 방향도 잃고 흔들리고 있다.
한편 이 속에서도 태평을 누린달까?
황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는 무리들이
사기와 도박과 승부와 향락에 취해서
이 전율할 밤을 한껏 탐닉하고 있다.
내가 이 속에서 할 수 잇는 일은 무었일까?
저들에게 새 십계명은 무엇일까?
아니, 새것이 있을 리가 업고
바로 그 십계판을 누가 어떻게 던져야 하는가?
여기에 이르면 판단 정지!
오직 전능과 무한량한 자비에
맡기고 빌 뿐이다.

밀씀의 실상
영혼의 눈에 끼었던
무명의 백태가 벗겨지며
나를 에워싼 만유일체(萬有一體)가
말씀임을 깨닫습니다.
노상 무심히 보아오던 손가락이 열 개인 것도
이적(異跡)에나 접하듯
새삼 놀라웁고
창밖 울타리 한구석
새로 피는 개나리 꽃도
부활의 서범을 보듯
사뭇 황홀합니다.
창창한 우주, 虛漠(허막, 사막 막)의 바다에
모래알보다도 작은 내가
말씀의 신령한 그 은혜로
이렇게 오물거리고 있음을
상상도 아니요, 象徵(상징)도 아닌
實相(실상)으로 깨닫습니다.

2층으로 오르는 계단

2층에는 선생의 생전 도서를 기중하여 보관하고 있습니다.

관수재
구상시인의 '강' 연작시를 100여편을 발표할 정도로 낙동강은 구상시의 원천이었다.
관수재는 시인이 강을 바라보며 끊임없이 마음을 씻고 가다듬은 관수세심(觀水洗心)의 삶을 살았던 곳이다.
관수재의 단골손임은 친구였던 천재화가 이중섭이었다.
지인들과 함께하며 삶과 예술을 노래하였던 당시의 체취를 느낄 수 있다.
시인 구상의 생전에 사용하였던 타자기와 필기도궁 등 전시되어 있는 방
◐신나무골 성지

신나무골 성지에 왔습니다.

주차장에서 바로 오르는 지름길입니다.

사제관

십자가형 한옥성당
로베르 신부는 1883년부터 경상도를 사옥하기 위한 거점으로 대구를 지목했다. 하지만 여건상 바로 대구로 들어갈 수 없어서 1885년 12월 신나무골에 사제관을 마련했다.
1887년 11월 새방골로 들어와 대구로 들어갈 수 있는 방안을 찾았다. 1891년 1월 25일 대구에서 추방된 로베르 신부는 외교적인 해결로 1891년 4월 30일 대구로 돌아 왔고, 12월 대구 계산동으로 거처를 옮겼다. 1893년부터 성당이 비좁아지자 큰 성당을 지을 결심을 했다. 1894년 초부터 계산동에 성당 짓기 위해 목재를 구입하고, 성당을 지을 터를 마련했다. 1895년 9월 성당 부지의 평탄작업을 하고, 담장을 쌓았다.
로베르 신부는 계산동에 유럽식 성당을 지으려 했지만 여러 가지 문제로 1895년 10월 포기했다. 계산동에 성당을 짓기 전에 임시 성당과 사제관을 마련했다. 1895년 12월 대어벌 집(수창초등 부근, 국채보상운동 발생지)을 사면서 계산동에 한옥 성당을 짓기로 계획했다. 성당을 짓기 시작한 1896년 5월 31일부터 1898년9월까지 로베르 신부는 대어벌에 거주하면서, 임시로 '성 요셉'성당을 세웠다. 로베르 신부는 1898년 9월 1일 성당과 사제관을 완공했고, 12월25일 비에모 신부와 함께 성당을 축성했다.
약현성당(1893년), 답동성당(1896년), 명동성당(1898년) 다음으로 성당이 건립됐다. 성당은 가로 세로 9척 6간(25m)으로 총 45간이었고, 십자가형 한옥 기와집 성전을 '루르드 의 성모 성당'이라 했다. 하지만 목조 건물인 한옥 성당은 완공된지 2년 2개월 만인 1901년 2월 4일 밤 8시경 지진으로 시작된 화재로 전소됐다. 로베르 신부는 곧바로 프와넬 신부의 설계도를 따라 1902년 11월 25일 새롭게 고딕석 성당을 완공했다.
신나무골에 로베르 신부가 처음 지었던 십자가형 한옥 성당을 2018년 재현했다.
남아있는 사진 한 장을 토대로 지붕 위의 십자가와 창문을 재현했다. 벽을 보고 미사를 하던 시기여서 제대를 이동용으로 제작했고, 계산 성당을 모방해 감실을 제작했다. 지붕과 막새기와 담장 등에 있는 십자가는 계산성당 초창기 대문 담장에 있던 문양으로 현재 성모당 가장 윗부분에 24개의 십자가가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십자성당 출입문

내부



로베르 신부의 사제관
조선과 서양과의 문호가 개방되자 불랑 부주교는 1881년 11월 로베르(김보록, 1853~1922)신부를 경상도 지역의 담당으로 임명했다. 로베르 신부는 1881년 가을부터 강원도 횡천 부엉골을 기점으로 경상도 지방을 선교했다.
33세 로베르 신부는 1885년 12월 대구 읍내로 진출하기 위해 신나무골 이이전 안드레아에게 마루 하나가 있는 3칸짜리 공소 건물, 서당 선생 집, 논을 사서 정착했다. 명동성당(1882)과 강원도 이천(북녘 1883) 다음 남쪽에서 첫번쨔로 신나무골 성당이 설립됐고, 계산(대구) 본당이 시발점이 됐다. 복사 이호연 베드로, 서상돈 아구스티노, 서마리아가 보베르 신부를 보필했다. 연화학당(1886~1894)을 설립했고, 충주출신으로 거의 장님인 박상언 요한과 양자 비실리오가 천자문과 한글을 가르쳤다. 신나무골에 안착한 로베르 신부는 위험지역은 상복에 방갓 차림으로, 안전 지역은 평복차림으로 활동했다. 로베르 신부는 윤봉운 요셉의 도움을 받아 거제도까지 관할했다.
조불수호통상조약(1886.6.4.)으로 선교의 자유가 인정되자, 신나무골에 있던 로베르 신부는 1887년 11월 새봉골(송골)로 들어왔다. 로베르 신부가 새방골로 떠나자 보두네 신부가 신나무골에 와서 조선말과 풍습을 배우면서 18개월 동안 사목했다,
보두네 신부가 1889년 3월 전주 지역(전동성당 시작)으로 떠나자 죠조신부가 신부가 와서 조선말과 품습을 배우면서 1년동안 상주하면서 성사를 주었다. 죠조신부가 1890년 부산 영도(범일성당 시작)로 떠난 후 신나무골에 한동안 신부가 없었다. 피이아스 신부가 1894년 4월 계산동의 로베르 신부를 돕기 위해 신나무골로 왔다. 파이야스 신부는 1895년 9월 가실(가실성당 시작)로 거쳐를 옮겼고, 신나무골은 공소가 됐다. 1984년 남방의 첫 본당 터를 복원했지만. 위치와 방향과 모습이 정확하지 않았다. 로베르 신부가 살았던 새방골 사제관 사진을 활용해 2018년 새롭게 복원했다.
<현지 안내문에서>

카페

김보록(로베르) 신부상

빨래터

로베르 신부가 신나무골에 정착할 무렵 8~9가구의 36명의 신자가 있었다. 마을에 개천(까페 옆 도로)이 있었고, 냇가 옆에 빨래를 하는데 사용했던 우물이 있었다. 우물 아래에 작은 연못이 있었고, 연못 옆에 디딜방앗간(카페자리)이 있었다.
<현지 안내문에서>

빨래터 쪽에서 바라본 십자가형 한옥성당쪽

순교자 이선이 엘리사벳 약전
이선이 엘리사벳은 배손이(배손이, 배정모)와 결혼하여 칠곡 골버실(국우동)에 살면서 딸 하나와 아들 도령, 용철, 용덕을 낳았으며, 이 시기에 세례를 받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866년(혹 1860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잠시 신나무골로 피신해 갔다가 여부재와 학명동 흑다리를 거쳐 팔공산 중턱으로 피난했다. 1868년(혹 1860년) 2월 8일(양 3월 1일) 한티 옹기굴에 피신해 있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됐다. 포졸들이 심문하자 배손이는 배교해 풀려났고, 이선이 엘리사벳과 아들 배도령 스테파노는 "죽어도 천주교를 믿겠다"며 신앙을 고백했다.
포졸들의 심한 매질에도 신앙을 지켰고, 결국 작두날로 목이 잘려 순교했다. 당시 딸은 출가했고, 용철과 용덕은 나이가 어려 심문을 당하지 않았다. 숨어서 순교 상황을 지켜보던 배손이가 이선이와 배도령의 시신을 임시로 한티 뒷산에 묻었다. 얼마 후 이선이의 시신은 칠곡읍 아양동 선산(칠곡IC뒷산)으로 이장했으나, 미혼인 배도령의 시신은 이장하지 않았다. 19894년 7월 7일 천주교대구대교구 왜관 감목대리구에서 이선이의 유해를 신나무골로 이장하는 과정에서 목이 잘려진 것이 확인됐다. 7월 8일 이동호 쁠라치도아빠스가 대형 십자가를 축성했고. 대구대교구장 서정길 요한 대주교가 무덤을 축성했다.

신나무골 성지

◐우리들 마당

매원 한옥마을에 있는 우리들 마당이란 식당에 왔습니다.

한옥으로 지은 길다란 건물에 한켠은 식당. 다른 한켠은 카페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건물주는 한사람이지만 식당과 카페는 별개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내부

소불고기 전골과 두루치기 정식이 인기메뉴라고 합니다.
찬의 가지수가 많은 것은 아니지만 깔끔하고 맛도 있어 찾아도 좋을 집입니다.

이집 메뉴

안쪽으로 카페가 있습니다
분위기가 좋아 테이크아웃으로 아메리카노 한잔 시켰습니다.

므므흐스

이기는 므므흐스 전시장이 될 공간입니다.
햄버그? 가게
뭐먹었어.
지역 맛집인지 차량이 많이 주차되어 있습니다.
◐매원마을

칠곡 매원마을
이곳 매원마을은 400여년을 이어 온 광주이씨(廣州李氏)집성촌으로 안동 하회마을, 경주 양동마을과 함께 영남 3대 반촌 중 하나이다. 풍수지리상 주산에 해당하는 북쪽의 용두산과, 용두산 왼쪽으로는 죽곡산이, 오른쪽에는 산두산이 마을을 감싸고 마을 앞으로는 동정천이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형에 넓은 문전옥답을 안은 명당이다. 마을 이름은 매화낙지형의 길지에 마을이 있다는 점에서 또는 매화와 매실이 많았던 이 마을에 여행객의 숙식 편의를 제공하던 원(院)이 있었다는 점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1623년 석담 이윤우가 이곳에 감호당을 지은 뒤 인근의 지천면 신리 웃갓마을에 있는 종가에 장남 이도창을 남겨 두고, 차남 낙촌 이도장(李道長), 삼남 감호당 이도장(李道章)과 함께 정착하였다. 이후 이 마을에는 낙촌 이도장의 차남인 박곡 이원록의 후손과 감호당 이도장의 후손이 대대로 거주하고 있다. 특히 이원록의 장남이 마을의 중앙인 중매에 자리를 잡고, 차남은 동쪽의 상매, 감호당 이도장의 후손들은 서쪽 서매로 각각 동촌(同村) 분파하면서 마을의 영역이 좌우로 확장된 점은 다른 전통 마을의 확장 양상과 구별되는 이 마을만의 특색이다.
마을 내 가옥들은 튼 ㅁ자형, 튼 ㄷ자형, 二자형 등의 형태를 띤다. 19세기 이후에 건립한 가옥은 튼 ㅁ자형 위주에 사랑채은 안채 앞이나 안마당 옆에 배치하고, 사랑채 옆으로 곳간채, 아래채 등을 나란히 배치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안마당 좌우로 별도의 곳간채, 광 등 저장 공간이 배치된 점은 19세기 이후 농업을 기반으로 한 부농층의 주거 배치 형태와 비슷하다. 이것은 신분보다는 경제력에 따라 건축 형태가 달라지는 당시 사회상을 입중하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기록에 따르면 마을 남쪽에 사창(社倉)이 있었으며, 1900년대 초 마을이 가장 번성하였을 때에는 420여호 이상의 기와집과 180호의 초가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6.25전쟁 당시 매원마을에 주둔한 북한군을 공격하려고 유엔군이 대규모 폭격을 가해 가옥 대부분이 불에 타 없어졌다. 현재 남아 있는 전통 가옥은 약 60여호 가량이다.
한편, 마을에 터를 잡은 광주 이씨는 조선 후기 영남학파와 남인계를 주도한 인물을 다수 길러낸 영남의 대표 가문으로 이 마을에서만 문과 장원을 포함하여 과거 급제자 22명을 배출하였다. 이런 이유로 이 마을을 장원방(壯元坊/동네 방)이라고 불렀으며, 마을 동쪽에 있는 산을 장원봉이라고 한다. 이 밖에 당대 영남학파 명가들과 혼인 관계를 맺었으며 특히 근기남인의 주요 명가와 혼인으로 맺은 유대 관계는 영남 지역의 다른 남인 가문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현지 안내문에서>
근기남인: 남인은 조선시데 붕당 중 하나인 동인에서 분파하였으며, 학문적으로는 이황의 학통을 잇고, 지역적으로는 안동을 중심으라 하는 경북지역과 서울, 경기권을 주요 근거지로 삼아 활동하였다. 남인을 嶺南, 서울 경기지역 남인을 京南 혹은 近畿南人이라고 한다.

먼저 감호당을 둘러봅니다.
감호당은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우측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초행이라면 왼쪽으로 입구를 찾기 쉬우나 문이 닫혀 있을 수 있습니다.

감호당입니다.

현재 감호당은 앞 마당보다는 뒷뜰이 넓습니다.

방지도 있습니다.

감호당(경상북도 문화유산 자료)은 1623년 석담 이윤우가 퇴계학을 계승하고 후학을 가르치기 위해 지은 건물입니다. 만년에 아들 이도장(李道章, 이윤우의 셋째 아들로 호는 감호당)에게 물려주었고, 이도장은 여기에 거쳐하며 후학양성을 이어갔습니다.
정면 5칸, 측면 1칸 규모의 一자형 건물로서 좌측에는 한 칸, 우측에는 두 칸 규모의 온돌방을 두었습니다. 좌측방에는 불괴문(不愧門, 부끄러워할 괴)이라는 편액이 글려있는데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산다"라는 뜻으로 항상 올바른 행동으로 후락에게 모법이 되고자 했던 스승이 기거했던 방입니다. 우측방은 '무첨실(无?忝室,없을 무, 더럽힐 첨)'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으며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여 학문을 공부한다"라는 의미로 유학을 배우는 학동들의 공부방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건립연대를 17세기 까지 올려 볼 수 있는 널영쌍창(창틀 가운데 작은 기둥을 세운 판자로 만든 창)과, 위상을 읽게 하는 흔치 않은 제공형 보아지(기둥머리 또는 주두에 끼워 보와 기둥의 짜임새를 보강하는 짧은 부재)가 이색적이다.
감호당은 역사적으로 이 지역에서 차지하는 석담의 사회적 위상뿐만 아니라, 마원마을의 역사문화 환경의 중요한 요소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

鑒湖精舍(감호정사)
본 정사는 石潭先生(諱 潤雨 贈 이조참판 1569~1634)께서 晩年에 梅湖의 泉石之勝을 사랑하여 仁祖元年(1623, 55세시)에 小齋(소재)를 지어 鑒湖堂이라 扁名(편명, 작을 편)하여 편히 쉬고 講學하던 곳이다 易簀(역책)하기까지 侍奉(시봉)한 季子(계자_ 감호공(휘 도장 증 이조참판 1607~1677)께서 선업을 전수하여 그 뜻과 학문을 계승하고 講明(강명)하였다. 오랜 세월에 세번의 중수를 거쳐 서기 2002년 10월에 중수하였다.
鑒湖(감호)란 梅湖(매호)의 香내나는 池塘(지당, 연못 당)을 한결같이 鑑念(감념)하면 開悟(개오) 한다는 이미라 합니다
<감호당뒷편 마당가의 안내문에서>

감호정사 편액과

우측 鑒湖堂(감호당, 거울 감)으로 미수 허목의 글씨라 합니다만 전서체는 알아보기 힘듭니다.

좌측 水月軒(수월헌) 편액이 걸려있습니다.

감호당 유물관

매원마을 앞엔 넓은 연못이 있습니다.
깊이가 있는 저수지는 아닌 것 같고 논에 물을 가둬 연못으로 만든것 같아보입니다.

마을을 한바퀴 돌아 봅니다.
연못을 따라 쭉 갔다가 되돌아 오면서 마을 안길을 둘러볼 겁니다.

수정문

가선대부 사헌부 대사헌 박곡이공 신도비

칠곡 진주댁 / 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

사랑채? 문간채?
實農齋(실농재) 편액을 달았습니다.

진주댁은 왜관읍 매원마을의 상매에 위치하고 있으며, 박곡 이원록의 9세손 상립에 의해서 건립되었다. 진주댁은 전물의 농경지와 동정천, 못안들, 안산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원래 안채. 사랑채, 곳간채, 대문채 등으로 이루어진 부유한 양반가 후예의 주택으로 보인다. 현존하는 안채와 사랑채는 일제식민지배기의 새로운 양식이 부분적으로 수용되긴 했지만, 대체로 매원마을의 전통적인 건축 양식이 계승, 유지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또한 안채는 좌우측면에 눈썹지붕을 달아 실 공간을 효율적으로 확장했고, 대청 전면에 문을 달아 외기를 막도록 했다. 이런 모습은 실 공간을 효율적으로 이용하고자 한 조선 후기 상류가옥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안채

사랑채? 곳간채?
일반적인 조선시대 상류층의 주택이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 그리고 안채로 이어지는데 그런 배치와는 조금 달라보입니다.


도로변의 익산댁 / 국가둥록문화유산
익산댁은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一자형 안채와 부속채로 구성된 가옥이다. 안채는 1칸의 대청을 중심으로 안방과 건넌방이 있으며 안방의 서쪽에 부엌이 있는 건물이다. 부엌을 제외한 3칸의 공간 앞에는 툇마루를 두었다 앞쪽에 새시 문을 설치하는 등 생활의 편의를 위하여 일부를 개조하고 수리하였으나 비교적 가옥의 원형이 잘 남아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대문은 잠겨있고, 외견상 별 볼품이 없습니다.

창랑댁에 왔습니다.
이 건물은 대문채인데 주변에 담이 없이 홀로 서있습니다.

사랑채 입니다.
이곳 마을에서 가장 고색미 나는 건물입니다.

사랑채를 뒷쪽(안채쪽)에서 보면 이런 모습입니다.

창랑댁 / 국가등록문화유산
창랑댁은 이원록의 후손인 이이호가 1859년(철종10)에 지은 가옥이다. 이 가옥의 원래 이름은 아내의 친정 지명인 창락(昌樂, 오늘날 창녕군 창녕읍)에서 유래하였다.
원래 대문채, 사랑채, 안채, 광채를 중심으로 마구간, 중문채, 디딜방앗간 등 일곱채의 건물로 이루어진 가옥이었으나 지금은 대문채, 사랑채, 광채, 안채가 남아 있으며, 2018년에 대문채, 광채, 안채를 고쳐 지었다.
안채는 정면7칸, 측면 1칸으로, 정면에서 보면 2칸 대청과 2칸 안방을 중심에 두고 대청 동쪽으로 건넌방 1칸, 안방 서쪽으로 부엌과 창고 2칸이 배치되어 있다. 사랑채는 정면5.5칸, 측면 2칸 규모로 2칸 대청과 2칸 큰사랑방을 중심으로 대청의 서쪽에 0.5칸 규모의 감실(사당 안에 순주를 모셔두는 장)을 설치한 구조가 독특하다. 안채와 사랑채 모두 좌우 측면에 가적지붕(일종의 눈썹지붕)이 있다. 현존하는 건물과 기록으로 볼 때 조선 후기 부농형 가옥의 전형적인 평면 구조와 공간 구성을 유추할 수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광채

승산댁에 왔습니다.
승산댁(국가등록문화유산)은 마을 뒤편 산지로 이어지는 구릉 대지 위에 남동향의 안채와 서향의 헛간채가 약간 비껴있는, 튼 ㄱ자형의 가옥이다.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에 부엌, 안방, 마루, 건넌방을 갖춘 一자형 건물이며,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헛간채는 정면 3.5칸, 측면 1칸 규모에 방1칸과 도장방(부녀자가 거처하는 방) 2칸이 이어진, 우진각지붕으로 된 건물이다.. 같은 마을길로 연결된 창락댁, 익산댁과 함께 농촌 지역 상류 주민의 생활을 알 수 있는 가옥이다.
<현지 안내문에서>

현 승산댁은 대대적 수선 중입니다만. 위 창랑댁에 비하면 규모도 작고 볼 품 없습니다.

지경당을 둘러봅니다.

창랑댁, 진주댁 등 웬만한 집들은 안내문이 있습니다만 이 집은 규모도 있고, 잘 지어진 집아라 안내문이 있을 듯 한데 보지못했습니다.

사랑채?

지경당 편액이 잘 보이지 않는 저곳에 걸려있습니다.

작은 방이 아기자기하고 정교하게 배치되어 있습니다.

안채로 가 봅니다.

안채,
현 주인이 거주하고 있지는 않은 듯 합니다.

대문채이자 곳간채?

해원고택으로 갑니다.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가 있습니다.
해은고책 /경상북도 민속문화유산
칠곡 해은고택은 박곡 이원록의 5세손 이동유가 정조 12년(1788)에 지은 가옥이다. 사랑채는 순조 16년(1816)에 지어졌으며 이동유의 손자 이이현의 호를 따르 해은고택이라 불린다.
대문채를 지나면 사랑채, 곳간채, 안채가 ㄷ자형으로 배치되어 있고 안채 오른쪽에는 담장을 두르고 사당을 두었다. 대문채는 정면 세 칸, 측면 한 칸 크기이며, 사랑채는 정면 일곱 칸.측면 한칸 반, 곳간채는 정면 여섯칸. 측면 한칸, 안채는 정면 여섯칸 반. 측면 한칸 크기이다. 모든 건물의 지붕은 측면에서 보면 사람 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칠곡 해은고택은 매원마을의 여러 고택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고 남부지역의 특징인 개방적인 가옥 배치 형태를 갖추고 있어 시대와 지역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해원고택 편액과,

수연당 편액이 걸려있습니다.

사랑채 옆에 보호수? 회화나무


안채

곳간채?
사랑채에는 노모가, 안채에는 미모가 출중하신 주인이 실제로 거주하고 있어 뒷편 사당쪽으로 가보지는 않았습니다.

칠곡 중방댁에 왔습니다.
지경당, 해은고택, 중방댁은 서로 이웃하여 있습니다.

칠곡 중방댁은 조선 중기의 문신 이원록의 8세손인 이승연이 1860년대에 매원마을에 세운 가옥이다. 중방댁의 뒷편으로는 용두산이 마을을 감싸고 있고, 용두산의 양옆에는 죽곡산과 산두산이 있다. 마을 앞에는 농경지와 동정천이 있어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중방댁은 안채, 사랑채, 중사랑채, 광채 4동을 트여 있는 ㅁ자형으로 배치하고 앞에는 대문채와 마구간을 둔 총 6동의 가옥이었다. 그러나 6.25전쟁 당시 폭격 등으로 소실되어 현재는 안채와 중사랑채만 남아 있다. 안채는 정면 8칸, 측면 2칸의 남향 건물이며, 중사랑채는 안채의 앞에 세워진 정면 5칸, 측면 3칸의 동향 건물이다. 중방댁은 조선 후기의 전통 상류주택으로 당시 가옥의 입지와 배치, 건축 양식을 살펴볼 수 있는 매원마을의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현지 안내문에서>

희우당(喜雨堂)?
대문이 닫혀 있어 내부는 들어가 보지 못했습니다.
앞에 서당 (국가등록문화유산) 안내문이 있습니다.
서당은 마을 내 상매와 중매의 경계에 있는 광주 이씨 문중의 글방이다. 맺배지붕에 가적지붕을 덧댄 정면 5.5칸, 측면2칸 규모의 건물이며, 2칸 대청을 중심으로 2칸 온돌방과 1칸 온돌방의 좌우에 배치하고 2칸 온돌방 서쪽에 반칸의 부엌을 덧대었다. 대청 중앙 기둥은 원기둥으로 하고 두공(큰 규모의 목조 건물에서 기둥 위에 지붕을 받치며 차례로 짜 올린 구조)을 설치라여 건물의 품격을 높였으며, 방 전면에 쪽마루를 깔아 출입하기 편리하도록 하였다.
<현지 안내문에서>

서당을 담 밖에서 바라본 모습입니다.

관수재 / 국가등록문화유산
관수재는 조선 중기 유생 이원호를 추모하고자 후손들이 지은 재실이다. 정면 5칸, 측면 1.5칸 규모이며, 중앙의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각각 1칸, 2칸의 온돌방을 배치하고 전면에 툇간을 둔 중당협실( 중앙의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배치한 구조)구조로, 상매의 용산재와 비슷한 건물이다.
<현지 안내문에서>

대문이 닫혀있어 담 너머로 보지만 나무로 또한 가려있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이곳은 ?
아래 독립유공자 생가와 관련이 있을 듯 한데 기억이 잘 나지않습니다.

독립유공자 생가
우당 이수목(1890.8.2~1978.2.4)
1925년 이후 상해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지원
1940년 여운형선생과 국내서 건국동맹을 조직하고 한국 해방을 비밀리 준비
1945년 6월 건국 동맹 사건으로 경기도 경찰서 고등계에 수감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더불어 출감
포상(제 15439호) 대통령 노무현으로 부터
이두석(1942. 5. 19~ 1938. 3 .23)
1930년 서울 중동중학교 재학중 광주학생 사건에 연류되어, 서을 종로 경찰서에 29일 수감 후 퇴학
1937년 일본 중앙대학교 졸업후 고향 왜관에서 농촌 계몽운동을 전개하고, 독서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 활동을 진행
1938년 독서회 사건의 발각으로 대구 경찰서에 수감 중 사망
포상(제876호) 건국훈장 애족장 대통령 박정희로 부터


박곡 종택 / 국가등록문화유산

박곡종택은 중매에 있는 이원록의 종택이다. 원래 본채 38칸, 사랑채 및 행랑채, 별채, 대문채, 곳간 등 86칸으로 된 ㅁ자형 가옥이었으나, 6.25전쟁 당시 북한군이 이곳을 사령부로 사용하면서 유엔군의 폭격을 받아 가옥의 대부분이 불에 타고 파괴되었다. 1988년에 안채 일부를 복원하였고, 건립 당시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건물은 별채와 사당이다.
안채는 마을 내 다른 가옥과 달리 중앙에 4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익랑이 붙은 ㄷ자형 건물이다. 전통적인 영남지역 안채의 형식을 따르고 있으나 상대적으로 대청이 큰 편이다. 겹처마로 된 지붕은 이 집 주인의 권위를 보여주고 있다. 별채는 동쪽 끝에 1칸의 마루를 두고 서쪽으로 2칸의 온돌방과 1칸의 온돌방이 이어진, 툇마루를 둔 팔작지붕 건물이다. 전쟁으로 소실된 안채를 대신히여 1988년까지 임시 주택으로 쓰였다.
이원록의 불천위를 모신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전면에 툇간을 두었고, 중앙 칸을 좌우 칸에 비해 크게 만들었다. 전면에 원기둥을 사용하여 종가의 권위를 표현하고 있다.
한편, 종택의 곳곳에서 6.25전쟁 당시의 상흔을 찾아볼 수 있는데, 소실된 건물들의 주춧돌과 폭격으로 인한 흔적이 사당 기둥에 남아 있다. 그리고 종택을 둘러싸고 잇는 담장은 폭격으로 소실된 종택의 기붕 기와 편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현지 안내문에서>

문이 닫혀 있는 것 같다 종가를 구석구석 둘러보지는 못했지만 대단한 규모이다.

마을 앞으로 나와 매원마을 탐방을 마무리 합니다.
◐송정자연휴양림

송정 자연휴양림에 왔습니다.
안내도를 보면 산책하기 좋을 듯 싶기도 합니다만 생각했던 곳 보다는 아닙니다.
입구 매표소에서 휴양림을 단순 둘러보러 왔다고 하니까 경로를 적용 무료로 입장시켜 줍니다.

차량으로 이곳까지 올라왔습니다.

여느 자연휴양림이 그렇듯이 산막 또는 야영으로 자연속에서 하룻밤을 보내는데 중점이 있습니다.

산막 윗쪽으로 산책로가 있어 조금 걸어보기로 합니다.





지나 올라온 곳을 되돌아 봅니다.



윗쪽으로 길이 있는데 어디까지 있는지는 모르겠네요.

되돌아 내려갑니다.





저만큼 출발지.

송정휴양림 주변으로 임도가 조성되어 있는 듯 합니다만. 생각했던 것 보다는 산책로가 썩 좋아보이지 않습니다.
언젠가 이곳 휴양림 주변을 산책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어 다른분 자료를 검색해보고 보완을 할까 합니다.
이후 왜관읍내로 이동하여 호국평화공원과 주변, 말하는 은행나무 등 몇군데를 둘러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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